제목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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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07-17 | 조회수737 | 추천수3 | 반대(0) |
성지순례 중에 미술관을 가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습니다. 성지순례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성지순례 중에는 피렌체에서 미술관 방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미술관 방문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수태고지’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림을 해설하는 분은 수태고지의 그림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성모님의 오른 팔이 왼 팔에 비해서 더 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모님의 무릎이 유난히 두껍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너무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미술을 전공하는 분들이 오랜 시간 연구를 했지만 그 이유를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그 문제를 풀었는데 그것은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정면에서 보면 이해할 수가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수태고지 그림을 옆에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오른 팔도 왼팔과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의 무릎이 균형이 맞았습니다. 옆에서 보니 성모님이 읽는 성경의 탁자가 성모님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철저히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은 제대의 높은 곳에 있었기에 옆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을 때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근대과학 혁명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바로 관점의 차이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신앙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생각해 보니 예수님의 삶은 관점이 달랐습니다. 첫 번째는 ‘안식일’에 대한 관점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두 번째는 ‘자리’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원했습니다. 높은 자리는 성공과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중에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낮은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신 것도 낮은 자리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너희가 잔치에 초대 받거든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하여라. 세 번째는 ‘재물’에 대한 관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을 많이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자비, 나눔, 겸손, 희생’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인들이 ‘관점’을 바꾸는 출발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루가복음 15장에서 ‘회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온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점은 생각으로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이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갖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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