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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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18 | 조회수44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마태 11,20-24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낚시를 하러 갔습니다. 그 날 아버지는 맛있고 잡기도 어려워서 값이 많이 나가는, 말 그대로 ‘대어’를 많이 낚았지요.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젊은이가 종일 애썼는데 피래미밖에 못잡았다며, 잡은 물고기 중 한 마리만 자기에게 팔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해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돈도 받지 않고 그 귀한 물고기 한 마리를 그냥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낚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까 그 사람이 돈을 주고 고기를 사겠다고 먼저 제안했는데도 왜 그냥 주셨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답했습니다. “그렇게 낚시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더 이상 취미로 남을 수 없기 때문이지. 오래전에 그렇게 돈을 받고 귀한 물고기를 판 적이 있단다. 그러자 그 다음부터는 값이 나가지 않는 물고기는 잡아도 별로 즐겁지가 않더구나. 그래서 그 이후로는 절대 돈을 받지 않았지. 그덕에 지금까지 즐겁게 낚시를 할 수 있는거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 일 자체의 재미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취미생활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 원칙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기쁨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분 뜻을 따르는 것을 힘들고 괴로운 ‘일’로 여기며 대가를 바라기 시작하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신앙생활을 하는 태도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바뀌고, 나중엔 일주일에 겨우 한 번 참례하는 ‘미사’조차 지겨워져서 ‘대체 언제 끝나나’하고 시계만 보게 되지요. 바로 이런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꾸짖음을 들은 이유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꾸짖음을 들은 것은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의도적으로 방해했거나, 윤리 도덕적으로 심각한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저지른 죄악의 크기와 심각성으로 본다면 이교신인 바알 숭배에 빠져 예언자들에게 여러 차례 책망을 들었던 페니키아의 티로와 시돈이, 그리고 그 존재 자체로 부패와 타락의 ‘전형’이었던 소돔이 더 안좋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갈릴래아의 세 성읍 주민들을 두고 ‘죄악의 소굴’로 유명한 구약의 세 성읍 주민들보다 더 심각하다고, 그러니 심판 때에 더 큰 벌을 받을 거라고 경고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고을 백성들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보여주셨음에도,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았기에,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시는’ 공정한 사랑의 원칙을 적용하신 것이지요.
그들이 그토록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에 이르지 못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에 대가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임에도, 자기들이 마치 예수님을 위해 대단한 희생과 봉사를 해드리는양 착각하며, 그분께서 그 대가로 세속적인 성공을, 위험으로부터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해주셔야 한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 기대와 바람대로 되지 않자 주님께 등을 돌린 것이지요. 하지만 바닥에 엎어진 그릇으로는 빗물을 담을 수 없듯,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겠다는 의지로 마음이 그분을 향하고 있지 않으면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총을 하나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더 미루지 말고 내 온 마음과 삶으로 주님을 향하는 참된 회개를 즉시 실천해야 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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