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광야 인생의 수련자들_이수철 프찬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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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7-19 | 조회수43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광야 인생의 수련자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수련장이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의 사랑이 있어 마음의 순수와 겸손의 관상가요 신비가입니다. 어제는 아름다운 시화詩畫가 잘 어울리는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란 시를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지만 실은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7월16일 아침 산책중 장마철 어둔 날 환하게 무수히 송이송이 피어나는 무궁화꽃들이 하늘 사랑의 끝없는 고백처럼 느껴졌고 순간 떠오른 시였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제 강론을 카톡으로 정리해 보내주는 자매님이 꽃과 시가 어울린 아름다운 시화를 만들어 보내줬고 자매님의 기발한 착안과 솜씨에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얼마전 나눴지만 또 좋아서 나눕니다.
-일년내내 아니 평생을
날마다 위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을 배웠고
날마다 아래로 땅 어머니를 바라보며 흙의 겸손을 배웠습니다
“사랑합니다!” 때되니 하늘 사랑 고백하며 송이송이 환대의 사랑으로 환하게 끝없이 피어나는
무궁화꽃들 깊고 깊은 하늘 사랑의 고백이구나!-
깊고 고운 나라꽃 국화國花 무궁화꽃에 시가 참 잘 어울렸습니다. 7월부터 10월까지 약100일간 날마다 새롭게 줄기차게 피고 지는 무궁화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 끈기”라니 꽃말도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사람들인, 광야인생의 수련자들인 우리와 참 잘 어울립니다.
“멋지십니다. 깊고 깊은 하늘 사랑” 댓글의 카톡도 받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무궁화꽃이네요!” 라는 위로와 격려가 되는 메시지도 받았고, “시화 감사합니다. 시의 내용이 참으로 깊습니다.” 라는 메시지에,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비는 기도같습니다.” “무궁화꽃 시화 너무 예쁘네요.”
이어 조카의 “무궁화 삼천리가 아버지 아이디였던거 같은데 마침 삼촌 신부님께서 시를 쓰셨네요.” 댓글 메시지에 예전 제 강론에 “사랑의 향기마을” 카페에서 꼭 느낌을 달아주던 조카의 아버지, 셋째 형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궁화 삼천리” 바로 사랑했던 지금도 그리운 셋째 형님의 아이디였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애국가 후렴도 생각납니다. 오늘 시간되는 대로 애국가 4절까지 불러보고 가사도 익히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입니다. 날마다 평생을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넓고 깊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어디서나 하늘 사랑 배우라 눈만 들면 하늘입니다.
아, 바로 그 모범이 탈출기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모세야 말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두분 다 광야인생중 수련장 하느님을 일편단심 사랑했던 참 순수하고 겸손한 수련자였습니다. 두분 다 우리 국화 무궁화꽃을 닮았습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500권을 저술한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국심愛國心”이라 답했던 박석무님의 지체없는 고백도 문득 생각납니다.
우리 역시 평생 예수님을 수련장으로 모신 평생 수련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수련자로 선택하셨고 우리는 평생 예수님께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요 평생 수련장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은 축복입니다. 한밤중 강론 쓰는 시간이 저에겐 광야의 고독과 침묵중에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누구나 광야 인생을 살아갑니다. 참으로 예수님 수련장과 함께 할 때는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지만 예수님을 떠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모세가 광야 인생의 축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광야에서의 수련중 정화되어 마음이 순수와 겸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때가 됐을 때 모세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그 장구한 세월을 끝까지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속에 나타난 주님입니다. 다음 장면은 읽을때마다 감동이요 새롭습니다. 아브라함을, 야곱을 다정하게 불렀던 하느님은 이번에는 모세를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주님과 모세의 숨막히는 긴박한 대화가 오고 갑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우리 역시 똑같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찾을 때 바로 오늘 지금 여기는 하느님을 만나는 꽃자리요 신을 벗어야 할 거룩한 땅이 됩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고, 이어지는 하느님의 파견명령이요 서로 주고 받는 대화가 또 감동입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광야에서의 관상축복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파견되어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관상 친교의 꽃은 세상의 선교로 열매 맺어야 함을 배웁니다.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아, 이래서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수한 모세를 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겸손히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평생 당신의 수련자인 겸손하고 순수한 모세와 함께 하겠다는, 영원히 모세의 살아 있는 배경이 되어 주시겠다는 모세의 수련장이신 하느님의 확약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탈출기가 주님과 모세의 만남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순수와 겸손의 철부지 예수님에게 나타나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 예수님의 감동에 벅찬 감사와 찬양의 고백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광야 여정중 하느님 아버지를 만났기에 이런 감사와 찬양의 고백입니다. 대우가 대지입니다. 철부지들이 상징하는 바, 생각없는, 영혼없는 바보가 아니라 순수하고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바로 모세는 물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에 속하고 무수한 교회의 성인성녀들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됩니다. 모세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드님이자 하느님의 종으로 계시되는 예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드님의 은총이 있어야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데 이런면에서 예수님을 평생 수련장으로 모신 우리들은 참 행복한, 축복받은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그리고 장구한 세월에 무수한 예언자들에 성인들에 이어 마침내 때가 되어 예수님이 나타났으니 복음의 이때가 오기를 지금까지 기다렸을 하느님 아버지의 인내와 겸손의 기다림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광야인생의 오아시스와 같은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의 수련장으로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와 함께 지내고자 오십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29).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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