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살림의 주님, 구원의 주님, 시詩같은 인생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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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7-21 | 조회수37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살림의 주님, 구원의 주님, 시詩같은 인생 -사랑은, 예수님은 분별의 잣대-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어제의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시詩같은 만남이요 시詩같은 수녀님이었습니다. 한주간 조용히 피정집에서 휴가하다 떠난 수녀님인데 20년만에 왔다 했습니다. 선량하고 순수한 모습에 마음이 편했는데 알고보니 서울예대 문창과를 나온 동시童詩 작가 수녀님이었습니다. 수녀님과 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 제 청담淸談에 제가 감동했습니다.
“수녀님 동시가 좋다한들 수녀님만 하겠습니까? 수녀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시입니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그대로 한편의 시같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그대로 한권의 성서같고, 한편의 시같고, 한폭의 그림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렇고 탈출기의 모세가, 또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제 소박한 소원도 시같은 인생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수녀님은 크게 깨달은 듯 무척 기뻐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녀님의 인생이나 모습이 시처럼 보였습니다. 서울예대라 했는데 우리 삶은 인생의 예술대학이라 해도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장은 살림의 주님,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이구요.
마침 떠날 때 어느 착한 자매님이 많이 제본해준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 시집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1997년 첫 번째 제본한 시집입니다. 26년전 시들로 지금도 자주 인용하지만 인용할 때 마다 좋고 새롭습니다. 시들중 제가 참 좋아하는 두편을 읽어달라 했고 감상했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제가 사랑하는 여기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이는 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하느님 찾는 일에 지쳐있을 때 조용히 주님 안에 머물러 읽어보며 자신을 충전시키는 시입니다. 시같은 인생, 얼마나 멋진지요. 그 빛나는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시입니다. 온통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온힘을 다 쏟은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시같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어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님의 말씀후에 오늘 전개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이를 본 바리사이들의 지적입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배고픈 살아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안식일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바리사이들입니다. 도대체 그 마음에 연민의 사랑이 없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생명을 주는 사랑이 없습니다. 안식일법에 매어 있는 자유롭지 못한 영혼입니다. 이어 다윗 일행을 예로 들면서 이들의 무지를 일깨운후 최종적 결론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감동으로 와닿는 너무나 멋진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법이 아니라 자비가, 성전보다 큰 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자비에 정통했던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시같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온통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뿐이었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뿐이요 사랑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유로운 처신은 자비하신 하느님과 일치의 깊은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을수록 자비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대자대비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대자유인입니다. 자유롭고 싶습니까?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자비와 지혜의 주님 한분뿐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앞에서는 상대화됩니다. 절대적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살리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치유하는 사랑, 구원하는 사랑이 바로 분별의 잣대입니다. 과연 이런 경우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을까? 깊이 생각하면 답은 곧 나옵니다. 그러니 사랑이신 예수님 역시 참 좋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며 다음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늘 읽어도 좋고 새로운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이런 주님을 닮아갈수록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참 좋은 분별의 지혜에 참으로 자유롭고 자비로운 참나의 실현이요 아름다운 시같은 인생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바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희생제물이 상징하는 바 전례의 무시가 아니라 최종의 분별의 잣대는 율법도, 전례도 아닌 자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탈출기의 모세를 통해서도 당신의 살리시는 구원활동을 계속하십니다.
모세 인생 역시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는 부활성야 구약독서중 생략해서는 안되는 독서에 속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신 주님 사랑의 위업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파스카 주님을 업적을 재현합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아름다운 살아있는 시가 파스카 예수님이요 파스카 미사전례입니다. 말 그대로 파스카의 현재화를 이뤄주는,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켜주는 미사은총이요, 날로 주님을 닮아 시같은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모시켜주는, 날로 분별의 지혜를 더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116,12-13).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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