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6주일 가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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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23 | 조회수27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16주일 가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 마태 13,24-43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자기들이 정한 기준만이 올바르고 절대적이라는 왜곡된 신념으로 선과 악을 섣불리 규정하고 악을 성급하게 심판하려 드는 태도는 큰 부작용을 초래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피해자로 만들기 마련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그런 슬프고 아픈 사건들은 이미 수도 없이 반복되어 왔지요. 질병이나 재해가 발생하는게 사악한 ‘마녀’가 저지르는 악행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죄없는 여인들의 목숨을 수없이 앗아갔던 중세시대 ‘마녀사냥’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고통과 시련을 겪는 것이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핍박하고 대량으로 학살했던 ‘홀로코스트’도 그랬지요. 결과적으로 그와 같은 시도들은 악한 세력을 제거하여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선과 악은 그처럼 단순하게 구별할 수 없는 매우 심오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혹여 제대로 구별해내는게 가능하다고 해도, 인간은 다양한 관계로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기에 어느 한 사람을 그 관계에서 억지로 끊어내려고 하면 그와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다른 이들까지 피해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그대로 두시는 이유입니다. ‘가라지’는 표면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제 욕심과 본능대로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악하다거나, 윤리 도덕적으로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서 마땅히, 즉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밀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가라지’라고 부르는 잡초들도 그 존재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그들이 밀과 같은 밭에서 함께 자라기에 그들이 번성하는만큼 밀에게 돌아가야할 물과 양분이 부족해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농부가 밀 농사에서 풍성한 결실을 얻는데에 방해가 되기에 농부 입장에서는 가라지라는 존재가 미울 수 밖에 없고 한시라도 빨리 제거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그런 가라지들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당신 뜻을 거스르고 방해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더 심각하고 가슴 아픈 문제는 가라지들이 당신 일을 방해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지들이 세속적인 욕망과 본능을 따르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당신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자녀의 모습으로 변화될 때까지 인내와 자비로 기다려주십니다. 심판이라는 최후의 순간이 다다르기 전까지 그들이 당신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언제든 그들을 용서하시어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잔뜩 벼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의 핵심은 심판이 아니라 인내에, 단죄가 아니라 자비에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라지는 내면적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단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부정적인 모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내면의 가라지마저도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잘못을 방치하거나 죄악의 상태에 안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 결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그런 부정적인 모습은 진짜 내가 아니’라며 자신에게서 분리하여 타인에게 투사하려 듭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리게 되지요. 그들을 엄하게 심판하고 철저히 단죄하면, 그들을 대신 희생시키면 자기 결점을 감출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밭에 있는 가라지를 모조리 뽑아버리겠다고 나서는 종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자신들도 가라지와 다를 바가 없음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 그분과 상관없는 모습으로 살아서 회개라는 열매를 맺지 못한 ‘쭉정이’임을, 그럼에도 마치 자신이 풍성한 알곡을 맺은 대단한 밀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있음을. 그처럼 밀인 척 하는 가라지들의 특징은 핑계와 변명입니다. ‘사는게 원래 다 그런거’라며 잘못을 저지르는 자기 모습을 당연시합니다. ‘너는 뭐가 그리 잘났기에 그렇게 유별나냐’며 주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자기 모습을 합리화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한다고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종말의 순간 가라지와 같이 심판의 불 속에 던져져 멸망하게 될 겁니다.
그렇기에 제 손으로 심판하려는 ‘쭉정이’들을 만류하시는 주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가라지는 더 많은 수확을 얻어야 한다는 세상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뿐이지 그 존재 자체가 쓸 모 없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수많은 종류의 풀들도 마찬가지지요. 그 ‘쓸 모’라는건 고정불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며 시대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처럼 어제까지 쓸 모 없다고 버려지던 잡초도 내일은 놀라운 효능을 인정받는 ‘약초’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 자매를 ‘선과 악’으로 나누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단지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리’거나 ‘잘못’된게 아니니 섣부른 판단으로 그들이 올바른 길을 걸을 기회를 빼앗지 말라고 하십니다. 선과 악은 하느님께서, 추수 즉 세상 종말 때에 직접 판단하시고 결정하실 일입니다. 하느님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꼼꼼하게 보십니다. 사람들이 악인이라고 단죄한 세관장 자캐오에게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결단을,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으려는 의지를 끌어내십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주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과감함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 곁을 지키는 용기를 끌어내십니다. 그들을 섣불리 단죄하지 않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주셨기에, 따스한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을 끝까지 품어주셨기에 그들이 지닌 ‘밀’로서의 진면목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겁니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제거해야 할 것은 가라지가 아니라, 효율과 이익만 따지며 이웃에게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드는 우리의 냉정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가라지가 아니라, 나와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비난하며 제거하려 드는 우리의 옹졸한 마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밀과 가라지가 서로 사이좋게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상대보다 더 가지려는 욕심만 버린다면, ‘다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관대한 마음을 품는다면 가라지를 제거해야만,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겨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보다 훨씬 더 크고 귀한 사랑의 선물들을 누리며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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