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겸손한 믿음-
저에게 단 하나의 강론을 뽑으라면 저는 지체없이 31년전인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의 대축일 종신서원 미사시 강론을 뽑겠습니다. 31년전이니 그동안 참 많은 수도형제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주제로 한 강론이었고 셋째 대목을 나눕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새롭게 들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좋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인 패거리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불러 주셔서 모인 은총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좋아서 살기로하면 벌써 공동체는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착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착해서 구원받기로 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머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같은 그 어둡고 단조로운 회색빛 세월을 얄팍한 재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달콤한 인간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한계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근원적인 고독에 부닥쳤을 때 속수무책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외모를, 마음을, 재주를, 자리를, 업적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만이 영원하기에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영적으로보면 우리의 삶은 어둔밤 물위를 걷던 베드로와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도대체 믿음이 없이는 온갖 유혹의 바다, 쾌락과 탐욕의 바다, 환상의 바다를 건너 주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성 쁠라치도를 구해 낸 것은 성 마오로의 지극한 순종의 믿음이었습니다. 불신과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릴 때, 베드로를 질책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믿음을 견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젊음이 순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연륜이, 있는 자리가 성숙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믿음의 여정에서 누구나 초보자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초발심의 자세가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라는 대목에 대한 나열이었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반드시 앞에 붙어야할 말마디는 더불어요,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어야합니다. 내달 8월1일부터 6일까지 포르투칼 수도 리스본에서는 세계 젊은이들의 날 행사가 있고 교황님은 물론 전세계에서 60만명의 젊은 순례자들이 모일 거라 합니다.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 제목이 “타인들과 함께 기쁘게 걸어라” 였고 그 뒤에 “결코 혼자(never alone)’가 아닌 말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도반 형제들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이 참 많이 강조하는 말마디가 더불어(together)입니다. 어제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님의 강론중 한마디가 마음에 꽂쳤습니다.
“더불어 자라는 밀과 가라지들(Wheat and weeds growing together)”
최후 심판의 날까지 가라지와 더불어의 삶,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요 삶의 신비입니다. 제가 꼭 강조했어야 했는데 못했습니다. 역설적으로 밀의 성장에 함께하는 가라지도 필수입니다. 가라지없는 밀만의 세상, 환상이요 결코 영적진보도 없습니다. 가라지와의 영적전쟁중 영적진보입니다.
더불어 믿음의 여정,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더불어 여정중 고군분투하는 믿음의 전사, 모세요 예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인 두분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는 믿음이 부족한 더불어 여정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우리 믿음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추격하는 파라오의 군대와 과거를 그리워하며 불평을 쏟아놓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있는 모세입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렇게 만드는 것이오?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놔두시오.’하면서 이미 이집트에서 말하지 않았소.”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의 리더십은 얼마나 결정적인지 배웁니다. 리더십(leadership)은 펠로우십(fellowship)인데 공동체가 잘 따라주지 않으니 모세의 리더십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라. 똑바로 서서 오늘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루실 구원을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는 모세에 이어 즉시 하느님께서 모세를 격려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모세와 늘 함께 하는 더불어의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이집트의 파라오 군대도 하느님 수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두 대목, “주님께서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라는 구절입니다.
어쨌든 이런 믿음의 여정을 통해 모세도 함께하던 백성도 회개와 더불어 믿음도 새로이 배웠을 것입니다. 새삼 믿음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날마다의 공동전례기도수행이 참 좋은 믿음의 훈련이 되고 이와 더불어 알게 모르게 성장하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예표로 두분의 대조가 우리에겐 위로와 힘이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이 없는, 악하고 절개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전생애가, 특히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 빛나는 표징인데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미 요나의 표징은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됨을 봅니다. 이어 예수님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온 남방 여왕의 예를 들면서 거듭 이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 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겸손한 믿음이자 참나의 발견입니다. 평생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믿음의 모범인 예수님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다음 두 말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런 주 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보다 더 좋은, 빛나는 하늘 나라의 표징은 없습니다. 자랑스럽게도 주님을 모시는 우리 역시 빛나는 하늘 나라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미사은총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