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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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7-24 | 조회수43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마태 12,38-42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들이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표징이 있어야만,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임을 인정하고 믿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놀라운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을 보고서도,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그런 일을 한다고 모함했던 그들이, 아무리 놀랍고 대단한 표징을 본다한들 자기 고집을 꺾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표징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랜 불치병에 시달리던 이들을 따스한 손길 한 번으로 치유하시고, 이미 목숨이 끊어져버린 이들을 한 마디 말씀으로 일으켜 세우시며, 수 천 명의 군중들을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이셨는데, 그보다 더 크고 분명한 표징이 어디 있겠는지요?
그들이 예수님께 크고 분명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기적’과 ‘표징’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 사건이 먼저 일어난 뒤에 그에 대한 반응과 해석이 뒤따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표징’은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가지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기에 남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여겨 대충 흘려보내는 것에서도, ‘우연’이라는 낙인을 찍어 별거 아닌 일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것에서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표징을 보기를 바란다면 먼저 놀라운 일을 목격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게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 뜻에 대한 굳건하고 분명한 믿음을 지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릴 정도로 대단하고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는 대신 사람의 아들, 즉 당신 자신을 ‘표징’으로 제시하십니다. 당신의 말씀과 행적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표적인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셔서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를 향한 당신의 큰 사랑과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구원섭리를 동시에 드러내는 가장 극적이며 결정적인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을, 사랑 자체이신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니 다른 그 무엇도 필요치 않지요.
그러니 더 크고 놀라운 기적만 찾아다니는 어리석음에서, 더 객관적이고 확실한 표징을 먼저 요구하는 완고함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표징과 기적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은 ‘회개’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 민족 니네베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자기 잘못을 즉시 뉘우치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싫다고 메신저를 공격하며 물타기를 하는 요즘 사람들과는 달리, 하느님 말씀을 전한 예언자의 지위나 자격을 따지지 않고 전달된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을 발설하신 분을 받아들여 그분 뜻을 따르겠다고 생각과 삶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목격하는게 아닙니다. 주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으로 따르며 진정으로 회개함으로써 내 삶이 그분 뜻에 맞도록 변화되어야, 즉 나 자신이 회개의 표징, 사랑의 표징이 되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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