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시편126,5)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참 좋은 위로가 됩니다.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번역하면 이 어감을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사랑, 사람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또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은 ‘섬기다’의 섬김, ‘배우다’의 배움입니다. 봉사와 공부보다 정겹고 그윽한 어감의 섬김과 배움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복음의 사람입니다. 당신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학원’이라 정의합니다. 마산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녀원 정문에 붙어있는 명칭이 더 좋습니다. 학원이 아닌 배움터라는 표현이 정답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평생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에서 주님을 섬기고 형제를 섬기는 일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평생 섬김의 배움터에서 평생 섬김의 학인으로 살아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수도형제들 하나하나의 삶이 섬김으로 요약될 정도로 각자 소임을 통해 섬김의 삶을 실천하는 섬김의 여정을 살아가는 섬김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수도형제들에게 감동하고 배우는 것도 각자 일터에서 섬김의 책무에 지극히 충실한 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기도와 사랑에서처럼 여전히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축복, 섬김의 기쁨, 섬김의 찬미, 섬김의 감사,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등 참 기분 좋은 섬김이란 말마디입니다. 궁극의 섬김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이 섬김이요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깁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파스카 영성뿐이요 파스카 영성이 그대로 표현되는 종과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어원도 같습니다. 제가 수도사제로 강론 하면서 역시 참 많이 사용했던 주제중 하나가 섬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결론처럼 당신의 제자 공동체를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자기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 공동체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주님은 그 어머니의 청을 지혜롭게 말끔히 정리해 주신후 공동체 분위기를 일신시킵니다. 결코 세속의 사람들처럼 군림하거나 지배하고 통치하며 세도를 부려서는 안되고 오로지 섬김의 삶에만 전념하라는 명쾌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원한 감동을 선사하는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온전히 섬김과 비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의 공동체 중심에는 늘 섬김의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정말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전념할 수 뿐이 없을 것입니다.
샘솟는 섬김의 에너지야말로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보물입니다. 누구나 지닌 질그릇 속의 보물인 섬김의 에너지는 그대로 예수님의 생명력이요 백절불굴 삶의 원천이 됩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우리에게는 큰 격려와 힘이 되고 용기백배, 신바람나게 하니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바오로 일행의 삶인지요! 섬김의 일꾼으로 한결같이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지만 언제나 드러나는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거 이 질그릇 속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생명이란 보물이 우리 삶의 백절불굴의 원천이 되고 섬김의 직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바로 섬김의 종의 모범이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그 명칭도 참 아름답고 거룩한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입니다. 이 말은 590년 교황으로 뽑힌 대 그레고리오 성인이 최초로 사용했습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한결같이 미소띤 얼굴로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섬김으로 환대하는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사람 많이 만나는 분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미소띤 인자한 얼굴이니 질그릇 같은 존재지만 예수님 생명이란 보물로 가득한 초인적인 교황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중 첫째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베드로는 흡사 예수님의 삼총사같습니다. 사도들중 첫째로 순교한 분이 야고보 사도요 이분하면 2014년 안식년에 가졌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납니다. 성 야고보의 스페인어가 산티아고입니다. 다음 야고보 사도에 대한 전승이 신비롭고 은혜롭습니다.
“야고보의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겼 모셨으나, 711년 에스파냐와 이베리아반도 전역이 이슬람교를 믿는 무어족의 침략을 받고 나서 그 유해 또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던중 813년 해당 지방에서 살던 한 은수자가 별빛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는 ‘별들의 들판’이라는 뜻에서 ‘콤포스텔라’라불렀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자연스럽게 야고보의 이름을 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되었다.”
이어 전 유럽을 가로질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여러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곳은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3대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죽으셨지만 여전히 살아계셔서 세세대대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이들의 영적 섬김의 수호성인이 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지금도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의 수호성인이자 순례자의 수호성인으로 큰 공경을 받고 있는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그러니 사후에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들에게 영원한 섬김의 수호성인이된 성 야고보 사도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여정후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여정중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사실 죽을 때까지 섬김의 순례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는 섬김의 순례자들이기도 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의 순례 여정중 종과 섬김의 영성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야고보 사도요, 섬김의 순례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