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화聖化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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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7-26 | 조회수55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성화聖化의 여정 -한결같은 신망애信望愛의 삶-
"주님은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니,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와지도다."(시편103,4-5)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이 또한 하늘 나라의 비유에 속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절망은 없다”일 것입니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흡사 농부 하느님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농부 예수님처럼 생각되는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입니다. 얼마전 수도형제로부터 배웠던 참 좋은 인사말, “성화되십시오”란 말이 참 좋습니다.
어제 강론 제목은 “섬김의 여정-섬김의 순례자”였는데, 오늘 강론 제목은 “성화의 여정-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입니다.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강론중 참 많이 사용하는 말마디가 여정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은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여정, 성숙成熟의 여정이라함이 맞을 것입니다. 바로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한 이들의 삶의 여정이 그러합니다.
요즘 성경을 읽듯이 계속 즐겨 읽는 책들은 위인의 평전들입니다. 어제부터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 평전을 구입해 읽기 시작했습니다. 700쪽 이상의 두꺼운 평전을 보는 순간, “아 이렇게 가득한 삶을 살았구나!” 하는 감탄이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평생동지이자 아내였던 이희호가 없었다면 김대중도 없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생애를 선물로 받아 씨뿌리는 삶에 참으로 충실했던 분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내 평전이 있다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의 미사를 집전하면서 받은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자매회의 역사가 18년쯤되니 당시는 젊었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할머니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늙었다기 보다는 깊어지고 거룩해진, 순수하고 맑은 모습들이었습니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하면서 성화의 여정을 살아 온 모습들이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담쟁이란 시입니다. 요즘 한창 담벼락을 타오르는 담쟁이들이요, 25년전 써놨던 시이지만 참으로 많이 인용했던, 그러나 아무리 반복해도 늘 새로운 제 대표적 자작시입니다. 그대로 씨뿌리는 사람의 삶의 모습도 이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하늘 향해 힘차게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하늘 나라의 실현이다”-1998.7.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라 했습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씨뿌리는 과정에 충실한 정주의 삶이 바로 하늘 나라의 삶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진인사대천명, 과정에 충실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하느님은 삶전체의 과정을 보십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이처럼 믿음의 사람이자 희망의 사람입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에 개의치 않고,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수 있음은 궁극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이요 절망이 바로 대죄입니다. 정말 믿음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라면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하루하루 과정에 충실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삽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씨뿌리는 사람은 바로 한결같은 갈망의 사람, 열정의 사람, 사랑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이웃 형제들을, 삶을 한결같이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평범한 일상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수도자만 아니라 열정과 순수는 기본적 인간 자질입니다. 사랑의 열정이요 사랑의 순수입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신망애의 삶을 살아갈 때 척박한 땅은 좋은 땅의 옥토로 바뀔 것입니다. 실패인 듯 해도 결과는 성공의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충실했다면 어디선가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잘 익어가는 신망애 삶의 열매들일 것입니다. 다음 대목이 궁극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귀있는 사람은 들어라, 바로 경청과 겸손, 관상의 자세로 자신의 삶을 깊이 성찰해 보라는 권고입니다. 내 삶이 척박한 돌밭이나 가시덤불같은 밭은 아닌지 혹은 말씀의 씨앗들이 잘 자라나고 있는 옥토의 마음밭인지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참 많이 강조하는 신망애 삶의 선택과 훈련, 습관입니다. 자나깨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좋은 덕목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입니다.
탈출기의 주인공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의 대조가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의 예표와도 같은 모세의 삶도 참 한결같습니다. 불평하는 철부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을 것이나 하느님께 깊은 신뢰와 사랑, 희망을 두고 있기에 참 지도자 모세는 지극한 인내의 사랑으로 이들을 다 감당하시며 이들을 주님의 만나로 배불리십니다. 화답송 시편의 고백입니다.
“그분은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시어, 만나를 비처럼 내려 먹이시고,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한결같이 씨뿌리는 삶에,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제일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역시 그 모범입니다.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170-180년 경에 쓰여진 위경 야고보 원복음서를 보면 이들 부부가 얼마나 한결같은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섬기며 아기 갖기를 기도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이들 두분을 기념하는 전례는 6세기 동방교회를 거쳐 8세기 이후에 로마로 도입되었고, 14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그 결과 1584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7월 26일을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의 기념 축일로 지정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들 부부의 간절하고 항구한 소원을 들어 주시어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보고 배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부모의 거룩하고 충실한 삶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성화의 여정을 잘 살도록, 끊임없이 씨뿌리는 신망애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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