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영적전쟁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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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8-01 | 조회수419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영적전쟁 -주님의 전사, 영적승리의 삶-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4)
이런저런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그러하듯 제 매일 강론이 성장하는 겨자씨이자 성숙시키는 누룩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8월 첫날입니다. 7월의 달력을 넘기는 순간 8월 달력의 첫날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텅빈 한달이 하루하루 채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 8월 첫날처럼 신선한 감격으로 매일 선물같은 하루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1989년 7월 11일, 사제서품후 시작된 매일 미사에, 매일강론을 죽는 그날까지 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입니다. 광야와 같은 미국의 뉴튼 수도원에서 한동안 지낼 때 살아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은 공동전례시간과 공동식사시간 둘 이었습니다. 살아 있음을 서로 확인하며 위로와 평화를 얻는 시간이었고 여기서의 계속되는 수도생활에서도 똑같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추가하여 저는 날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강론을 쓰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로 향하는, 편해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식사시 원장 부재인줄 알아 그 자리에 앉아있던 부원장 수사가 원장이 오면서 불야불야 아래로 연쇄적으로 자리를 옮기던 두 형제의 모습과 제가 오지 않는 줄 알았는지 제자리에 앉으려다 아래로 내려 앉는 형제의 모습을 순간 포착하면서 느낀 생각은 윗자리를 향하는 것이 대부분 본능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전 맞은 편에 앉아있던 바오로 수사가 선종한 이후 그 자리는 저절로 다음 순서의 형제가 자리를 채우니 세상을 떠나면 깨끗이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즐거이 위의 높은 자리보다는 아래의 낮은 자리를, 편함 보다는 불편함을 선택해야 함을 배웁니다.
삶과 죽음은 함께 갑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시 마을 한복판 성당 주변의 공동묘지가 삶과 죽음의 평화로운 공존을 상징하는 듯 싶어 편안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세상을 떠난 그 많은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매달 생미사와 더불어 연미사를 봉헌하는 어느 자매의 지극 정성의 노력에 늘 감동합니다. 그분에게는 산 분들이나 죽은 분들이나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분들을 자주 기억하며 하루를 경건히, 최선을 다해 살아감이 죽은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죽은 분들에 대해 너무 무례하고 소홀한 현대인들입니다. 며칠전 받은 병고로 고생중인 수녀님의 편지글 일부입니다.
“비와 더운 날씨에 골목마다 길옆마다 쌓여 있는 냄새나는 쓰레기 치우시는, 환경 미화원님들의 가족과 생존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모습에서 그분들의 고된 삶을 느낍니다. 그분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신부님, 저는 요즈음 나이듦의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해지는 변화, 저하되는 면역력...안과, 치과, 이비인후과, 관절, 통증등으로 병원 출입이 일상화되었고 약이 한보따리입니다.-예수의 작은 자매 올림.”
매일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영적전쟁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믿는 이들은 주님의 평생 전사입니다. 결코 전의를, 투지를 잃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젊어서는 공부와의 전쟁, 중년에는 일과의 전쟁, 노년에는 병마와의 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그 빛나는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입니다. 두분을 통해서도 평생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의 우리의 신원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를 펼치는 순간, 끊임없이 영적전투중인 모세의 삶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치열한 영적전투에 영적승리를 성취했던 분들입니다. 죽어야 휴식이고 살아 있는 동안 휴식은 없었고 죽는 그날까지 계속된 병고등 온통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고통과 시련에 압도되지 않았으며 내적 위로와 평화, 희망과 기쁨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윤리신학의 대가 알폰소의 생애가 참으로 치열한 영적전쟁이었고 91세까지 장수하셨지만 마지막 20년동안은 심한 류머티즘으로 극심한 병고를 겪으셨지만 영적승리로 끝난 생애였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의 설립자이자 고해사제들과 윤리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고해시 항상 부드러운 태도로 신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성인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악습에 깊이 빠져들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부드럽고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 고해신부는 죄가 남긴 수많은 상처를 돌보아야 한다. 그는 풍부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중에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말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만남과 인내와 심판입니다. 날마다 수시로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룩한 영적 휴식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루 시작전 일찍 일어나 2-3시간 걸쳐 강론 쓰는 고요의 시간이 주님과 만남의 휴식시간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안식, 바로 예수님과 모세의 생존 비결이었습니다. 날마다 저녁에는 외딴곳에 홀로 물러나 아버지와의 깊은 친교의 관상시간을 확보했던 예수님이요, 오늘 모세와 그 백성들에게는 그 영적 쉼터가 바로 만남의 천막이었습니다. 다음 묘사가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섰다.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처럼 우리도 주님의 친구가 되어 다정히 대화를 나누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모세 앞을 지나시며 당신을 선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이런 자비하신 주님을 만난 모세는 만남의 천막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했다 합니다. 모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인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이 아닌 초대교회의 우의적 해설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정말 평생 치열한 영적전쟁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죽어야 끝나는 밀들의 가라지들과의 전쟁은 하늘 나라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과의 전쟁을 상징합니다. 분명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밀과 가라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가는 판단은 일단 보류하고 악한 이들에 대한 영적 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종말 심판은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아버지께 맡기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최후 심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최후 심판이자 구원을 상징하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늘 깨어 삼가고 인내하며 하루하루 본질적 삶의 깊이를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심판을 두려워하고 구원을 희망하며 지극한 인내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의 심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의인들의 구원입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을 들어라.”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참으로 깊이 경청하여 분명히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우리에게 좋은 휴식을 주시고 영적전의를 새롭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공의 빛처럼 빛나고 백성들에게 의를 가르치는 이는 영원무궁토록 별과 같이 빛나리라."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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