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은 진짜 유다를 저주하는 표현을 하셨을까 하는 묵상을 해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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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 작성일2023-08-06 | 조회수43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은전 30 냥을 받고 팔아 자신이 나중에는 그 죄책감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사람입니다. 복음에 보면 유다를 향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내용입니다. 실제 성경상에 나오는 신학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를 떠나서 그냥 단순히 복음에 나오는 의미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해 저주 아닌 저주 같은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그건 유다를 향해서 하신 말씀 같지만 사실 그 말씀은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다는 걸 저는 오래전부터 묵상해봤습니다.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 슬피 울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유다는 목을 맨 결과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 두 사람을 볼 때 수많은 강론이나 영성서적을 보면 가장 핵심적으로 두 사람의 차이를 대비시킬 때 등장하는 게 '회개'입니다. 두 사람이 똑같은 상황인데 베드로는 회개를 했고 유다는 그냥 예수님의 자비에 의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나 성경상으로는 그럴지는 모르지만 저는 한편으로는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어불성설 같지만 어쩌면 유다가 정말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한 제자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했을 때 사랑은 온전한 사랑을 말할 때의 사랑이 아닙니다. 유다도 자신이 자살을 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했을 것 같습니까? 단순히 스승에 대해 자신이 했던 잘못에 대한 후회 때문일 것 같습니까? 단순히 그런 후회만 있었더라면 오히려 예수님께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유다가 어떤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 표현이 없지만 복음에 그런 내용이 없다고 해서 유다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설령 복음을 떠나서 흘리지 않았다고 해도 저는 베드로의 눈물보다 더 깊은 슬픔의 눈물을 흘렸으리라고 봅니다.
눈물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흘리는 눈물만이 눈물이 아닙니다. 유다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자신의 생명으로 예수님께 자신의 죄를 대신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이 한 행동이 정말 어떤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줄 몰랐을 겁니다. 그게 나중에 벌어지고 나서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유다는 역설적이지만 자기가 생각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나중에는 아니였고 그렇게 잘못 생각한 부분에 대한 후회가 막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이 예수님에게 한 행동에 대해 어떻게 용서를 청할 정도의 일말의 생각도 할 처지가 아니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죽음으로써 자신이 예수님께 저지른 잘못을 사죄한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건 물론 한때 실수로 잘못된 판단을 했지만 역으로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묵상 글 제목에서도 표현을 했지만 실제 복음에는 저주와 같은 표현을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실제 그랬더라고 해도 그 마음이 예수님의 본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묵상을 해봅니다. 이 부분은 어쩌면 복음사가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형식은 유다를 향한 것처럼 액면적으로는 그렇게 표현을 했어도 실제 그 말씀의 과녁은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일 수 있다는 묵상입니다. 왜냐하면 냉정하게 따지면 우리는 어쩌면 유다가 예수님께 한 것보다 더 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지나친 말씀일 거라고 생각하실지는 모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그보다 더 했으면 더 한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2000년 전 로마군사와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실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과 공범입니다. 2000년 간의 시공을 초월한 공범입니다. 왜 공범인지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에 예수님의 육신을 못 박는 것만이 못 박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살인한다고 했을 때 실제 흉기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만 살인이 아니고 말로써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표현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면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는 먹칠을 한다고 했을 때 그건 엄청난 결례와 같은 것으로 표현을 할 수가 있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될 때는 단순히 예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건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바로 유다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어쩌면 유다보다도 더 보잘것없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유다를 향해 하신 저주의 표현과 같은 말씀이 만약 나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라면 하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봐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이 질문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이 설령 유다를 향한 저주의 말씀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우리를 향한 말씀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할지도 진지한 고민과 묵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깨어 있는 삶을 살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종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종말은 말 그대로 어떤 최종 시점이 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 시점만이 종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종말은 한 시점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 시제라는 말과 시점이라는 문법이 있습니다. 깊게 들어가면 아주 어려운 내용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근 종말에 대한 복음을 묵상해봤습니다. 지금 우리는 종말이 오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는 종말을 맞이하고 또 종말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치 물이 100도에서 끓듯이 말입니다. 99도까지는 끓기 위한 마지막 준비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를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단순히 유다를 향한 말씀이 아니고 진짜 그 대상이 우리를 향한 말씀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 좀 더 성숙한 신앙생활이 될 수 있게 하는 지렛대와 같은 역활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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