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모 승천 대축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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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8-15 | 조회수420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성모 승천 대축일 가해] 루카 1,39-56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가톨릭 성가 259번은 <성모 승천>이라는 성가입니다. 이 성가의 가사를 보면 성모님께서 어떻게 승천하셨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모님의 승천을 바라보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할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요. 한 번 같이 불러보면 좋겠습니다.
1) 성자 잉태하신 거룩한 몸 무덤 속에 안 계시게 많은 천사 두루 옹위시켜 부활 승천케 하셨네 2) 아들 예수 오른편에 앉아 면류관을 받으시니 천사 성인 찬미하는 노래 하늘 가득 퍼져가네 3) 마음 깨끗한 이들은 모두 주님 뵙게 되오리니 성모 우리 덕을 향한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후렴 : 성모 마리아 하늘나라에 들어 올림 받으시니 우리도 천국을 그리며 주 찬미하리다(2번)
“성모 승천”은 말 그대로 성모님께서 육신과 영혼을 온전히 지니신 상태로 하늘에 오르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능력으로 직접 하늘로 오르신 승천과 구분하기 위해 입을 ‘몽’자에 부를 ‘소’자를 써서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성모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고 따르신 결과 그분으로부터 큰 은총과 복을 입어 죽음의 세력에 완전히 지배 당하기 전에 하늘로 들어올려 지셔서, 하느님과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리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또한 성모님만 특별히 그런 영광을 누리시는게 아니라, 우리들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명의 삶을 통해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믿으며 희망하는 겁니다.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희망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믿을 교리’로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바 있습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하지만 그 영광을 누리시기까지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을 찾아가기 전까지 성모님의 삶은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결혼도 안한 처녀의 몸으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를 잉태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했지만, 그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게 된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실망한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파혼 당할 위기에 놓였고,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정결의 의무를 어긴 죄로 돌에 맞아 죽을 위험도 있었습니다. 또한 그동안 꿈꿔왔던 '보통 사람'으로서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을 모두 포기하고 자신을 온전히 희생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성모님은 ‘지지리 복도 없는’ 불쌍한 여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성모님을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 것은 오직 하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당신이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굳건한 신뢰 안에서,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존재라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마침내 온 세상을 구원하는 순간이 오면 자신도 아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으로써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의심 없이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 어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렸을 지언정 절망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는다고 해서 지금 당장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당신 앞에 놓인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시지도 않았지만 "주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커다란 "희망"이 되어 성모님이 절망 속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준 것입니다.
그런 성모님의 믿음을 칭찬하는 신앙고백이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터져나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육체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이미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보았으나 아무 소용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그녀였습니다. '아이를 주실 거였으면 진작에 좀 그러시지'라는 원망과 한탄으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무시하려다가 하느님으로부터 남편인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는 '징벌'을 받아 두려움에 떨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러다 정말 '하느님의 뜻'대로 잉태하여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산을 기다리는 그녀였습니다. 그런 그녀였기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자신도 처음부터 그렇게 믿었더라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려고 한 고마우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을텐데, 인간적인 부족함과 한계 따위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능히 극복해내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리라고 믿었다면, 남편인 즈카르야도 벌을 받아 벙어리가 되는 고통 속에서 죄인처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자신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자비를 찬미하며 기쁨 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맘껏 누릴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임에도 그런 믿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성모님의 모습이 대견하고 또 부러워서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는 신앙고백이 튀어나왔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반드시, 기필코 당신 뜻을 이루시고야 맙니다. 그런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고집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그 누구보다 나의 행복과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의심을 품고 스스로를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뜨려 불행하게 살게 만드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의미없는 고통이란 없습니다. 내가 보내는 모든 시간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이나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다 하느님께서 나를 더 큰 행복으로 이끄시기 위해 하시는 일임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 다시 말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섭리는 믿음으로 시작되어 순명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순명은 내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길’이 훤해보여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의 희망을 꺾지 않으십니다. 충만한 은총과 복으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우리의 희망을 채워주십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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