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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08-19 조회수323 추천수3 반대(0) 신고

230819.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더 큰 사랑을 위하여”(Maiorem caritatem)

 
축하합니다.
 
오늘은 우리 연합회의 창립자인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대축일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기념하며, 특강을 준비하였으나 그냥 다소 긴 강론으로 대체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위하여”(Maiorem caritatem), 이는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교황교서 [사도좌 편지]의 제목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오늘 <복음> 중에 나오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씀입니다.
 
“더 큰 사랑”이 진정 어떤 사랑인지, 성인의 삶이 어때했는지는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 성인의 시성식 때 하신 <강론>에서 잘 말해줍니다.
 
다음은 시성식 때 하신 교종의 강론 말씀 중의 일부입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안에서, 기도와 노동을 통하여 사랑의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찬례와 같았고,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1348년 큰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수도승임에도 불구하고, 병에 전념된 그의 수도승들을 돌보기 위해(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 머물기 위해) 몬떼 올리베또의 고독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 사랑의 확실한 순교자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의 이 모범으로부터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으로, 최고의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으로, 그리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으로, 우리의 신앙이 인도되도록 우리에게 초대장이 도착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표현이 있습니다. 곧 ‘기도와 노동’,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 ‘하느님 관상에 바쳐진 삶’, ‘사랑의 순교자’,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 ‘희생으로 준비된 사랑’,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음을 봅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조화는 결코 이론적인 숙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애덕적인 삶의 실존적인 실행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봅니다. 또한 이러한 애덕의 삶은 무엇보다도 기도와 더불어 실현된 삶임을 봅니다.
 
성인께서는 <편지 1>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덕들의 어머니는 애덕(사랑)이며,
동시에 이 애덕(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은 기도입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덕들이 ‘사랑’에서 태어나며, 사랑에 모든 덕들이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발견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기도하셨으며, 당신에게 있어서 ‘기도’와 ‘삶’은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차고 넘쳐서 ‘봉사’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는 <편지 39>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애덕(사랑)은 늘 봉사에 봉사를 더하는 모습으로 자기를 들어냅니다.”

이는 ‘사랑’은 결국 형제들에 대한 ‘봉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곧 형제에 대한 봉사로 드러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죽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지금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인께서는 실재로 페스트로 죽어가는 형제들에게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의 봉사였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순교였습니다. 그리하여 “더 큰 사랑”을 실행했습니다. 진정,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을 온 몸으로 사셨습니다. 성인께서는 참으로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편지 8>에서 이렇게 말한다.
 
“애덕의 부추김으로 고무된 사람은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 천상공동체의 지극히 거룩한 사랑을 통해서 모든 선한 것들을 얻습니다. 이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이 존재하도록 만들어졌고, 이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만일 당신이 땅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땅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사랑으로만이 우리는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오로지 사랑으로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고, 하느님이 되어 갑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성인의 이런 사랑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대체, 무엇이 세상에서 이미 명예롭게 살고 있었던 그를 외딴 산골 아코나로 떠나가게 했을까? 곧 성인의 수도승적 체험이 지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안토니오 다 바르가의 <연대기>에서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심오한 내적 열망에 사로잡혀 시에나 사람들인 고귀한 친구들 파트리치가의 파트리치오 및 프란치스코 그리고 암브로죠와 함께 살면서 밤낮으로 천상 것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함께 하찮은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뇌성벽력의 하느님(욥 37,5 참조)을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 하였다.”(연대기 2)

또 같은 책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도 전해줍니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마음의 통회와 기도에 몰두하기를 뜨겁게 갈망하였다. 그래서 혹자는 숲 속에서, 혹자는 작은 경당에서, 또 다른 이들은 외딴 장소에서 침묵과 한적함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홀로 기도하며 하느님께 순결한 손을 들어 올렸고, 자기 영혼의 내밀한 기도를 주 하느님 앞에 쏟아놓았던 것이다.”(연대기 11)
 
여기서 드러나는 <첫 번째 특성>은 요한 톨로메이와 그 동료들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갈망하며, 특히 ‘참회’의 삶을 통하여 신적 지혜를 추구하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억누를 수 없는 ‘관상’의 열망과 이와 내적으로 깊이 연관된 ‘참회’의 생활을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곧 끊임없는 회심과 하느님께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려는 열망, 그리하여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머물기 위해 모든 세상적 삶의 양식과 모든 형태의 우상을 포기하기, 바로 이것이 요한 톨로메이로 하여금 아코나로 물러가게 한 요인이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서관 연대기>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들은 거기에 살면서 참으로 비천한 참회의 삶을 살았다. 흔히 쓰는 표현으로는 은수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이 지녔던 이 ‘위의 것’을 갈망하며 사는 ‘참회’의 영성은 나중에 아렛조의 귀도 주교는 몬떼 올리베따또 수도원이 최초로 교회법적인 인정을 받은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인 <창설 인가서>(1313년 3월 26일)에서, 이들의 삶을 일컬어 “참회의 마음가짐 안에서 항구하게 머물렀다.”라고 하는 표현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또한 현대의 역사 연구가들은 “연합회 역사 최초의 사료들에 나타난 올리베따노 영성들”을 다루면서, 창설자들의 카리스마에 대한 증언들의 첫 번째 사항으로 바로 이 ‘관상생활’의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창설 인가서>의 전문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간택된 이들이 더 고요히 그들을 간택하신 분의 관상에 항구할 수 있게 그들은 스스로를 하느님께 봉헌하고 재물을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내어 놓았다.”
 
그러니 그들의 형제간의 친교와 세상과의 친교도 하느님과의 친교인 ‘관상’에서 흘러나온 자연스런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종 베네딕도 16세께서는 그의 시성식 강론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그의 삶은 형제들을 향한 겸손한 봉사로 이끄신
하느님 관상에 완전히 바쳐진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 똘로메이의 시성 청원관이었던 레기날도 그레고리오는 성인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거룩한 삶과 영웅적인 덕을 실천하는 모범을 남기셨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와 관상에 바쳐진 삶이었다.”

오늘 우리는 그분들 안에 일으키신 수도승적 동일한 체험을 우리 안에도 일으켜주시기를 청하면서, 창립자들의 마음을 닮아가기를 청했으면 합니다. 성령의 부추김으로 시작되었던 초대 창립자들의 모범을 우리의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언제나 ‘위의 것’에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과 ‘참회생활’과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랑과 친교’를 살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성>은 이러한 ‘위의 것’에 갈망을 둔 참회생활, 곧 똘로메이와 그 동료들의 회심의 삶은 이미 시에나 시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동료 인간들과의 동행으로 시작되었고, 그 삶의 진정성도 역시 사람들 가운데서 증거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상서관 연대기>에는 복자 베르나르도 똘로메이가 시에나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페스트에 걸려 죽어가던 80여명의 형제 수사들을 영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돌보다가 같은 병에 걸려 돌아가셨음을 전하면서, 이를 그리스도의 형제 사랑에 비유하여 “마지막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요한> 13장 1절의 말씀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을 오늘 독서기도 <제2독서>에서 “복자 베르나르도의 생애”에서 스카르피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영성은 바로 천상적 생활과 지상적 생활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곳에 있다.”

마지막으로, <상서관 연대기>에서 창립자들의 아코나에서의 생활을 말해주고 있는 부분을 읽어드리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진정한 흠숭자요 연인인 이 세 명의 공경 받을 분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바로 이 황량한 곳의 침묵 속에서 붙박혀 살았으니, 전에는 숲이었고 들짐승들이 살던 이곳은 그들에 의해 이제 기도하는 집, 천사들이 사는 거처로 변모할 터였다. 이 숲 근처, 산을 둘러싸고 그리 넓지 않는 땅 몇 평의 작은 흙 오두막집 한 채가 있었으니, 바로 여기서 그들은 매우 비천한 고복, 곧 통상 쓰는 말로 한다면, 은수복을 입고 살았던 것이다. 붙박혀 살던 이곳에서 이 거룩한 사부들은 손과 마음의 단순함으로, 영혼의 가난함으로, 목마름과 굶주림으로, 추위와 헐벗음으로, 많은 밤샘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겼으며, 먹고 입을 것을 충당하기 위해 몸소 고된 땀을 흘려 일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노심초사했던 것은 법으로 정해진 성무일도의 시간을 빼먹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손수 단순한 흙벽돌로 지은 경당에 모이곤 했으니, 거기서 오롯한 신심과 영의 열정으로 성무일도를 바쳤으며, 찬가와 영가로써 주님께 마음으로 노래 불러 드렸던 것이다.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입문자였던 그들은 오직 성령만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 모든 것을 열정적으로 실행하였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주님!
어린이같이 아래에 있어,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가 되게 하소서.
아래에 있기에, 떠받들고 존경하게 하소서.
어린이처럼, 이해하지 못해도 신뢰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약하기에,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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