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정주 삶의 축복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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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8-23 | 조회수50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정주 삶의 축복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
"내 영혼아 주님 찬양하라. 주님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주시니, 내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시편103,2.5)
쉴 사이 없이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참 부지런한 하느님입니다. 배밭사이 길을 걷다가 이마를 부딛쳤고 위를 쳐다 봤습니다. 흰별들처럼 주렁주렁 달린 흰 배봉지 열매들중 하나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동안 참 놀랍게 많이 컸습니다. 작은 배꼭지에 찰싹 붙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열매를 보며 믿음의 배꼭지를 연상했고 이 또한 저에겐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가을 열매 익어 수확할 때까지는 믿음의 배꼭지는 꼭 나무에 붙어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중심에 계신 정주의 하느님은 쉴 사이 없이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정주 삶의 축복에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이 참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하면 괴물이요 답이 없습니다. 현 시국을 대할 때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아침식사후 부지런히 불암산 계곡길을 걷는 것도 기쁨이요 얼마전 써놓고 재미있어 한 글을 나눕니다.
“산에 가고 싶을 때 산을 바라보며 산이 되네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가 되네
강에 가고 싶을 때 강물처럼 걸어서 강이 되네
누가 알리? 이 행복, 정주의 축복 아마 하느님은 아실 거다”
늘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에서 산이 되어, 바다가 되어, 강이 되어 살아가는 정주 삶의 축복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라는 글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 또한 정주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제 집무실을 수도생활 잘 하라고 하늘이 숨겨둔 천장암天藏庵이라, 또 제분수를 잘 알아 만족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족암知足庵이라 부르곤 합니다. 천장암은 불교의 대선사 경허스님이 머물던 충남 서산 개심사에 위친한 암자이고 지족암은 흔히 일컫는 암자 이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 삶의 신비를 엿볼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이나 오후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가 똑같은 급료를 받자 항의하는 일꾼,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하느님의 권리에 대한 도전이요 월권입니다. 제 분수를 잃은 무례하고 무지한 이의 반응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요즘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는 기본소득제도의 원조임을 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 일하고 싶어도 심신의 허약이나 장애나 연로함으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모두가 인간의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매달 국가가 전국민에게 기본적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실현될 때 복지국가의 완성이요 이런 방향으로 가리라 봅니다. 바로 이런 복지사회의 완전한 실현의 모델이 우리 요셉 수도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동체가 소임에 무관하게 모든 이가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너그럽게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깊은 배려의 사랑은 늦게 온 사람의 속사정을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식솔이 딸린 무거운 짐을 진 가장이라면 일 시간에 개의치 않고 기본적 하루 생활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를 겸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을 만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분수를 벗어난 무지한 이의 항의를 깨끗이 매듭짓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시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네가 뭔데?”, “너나 잘해!” 꾸짖는 말투처럼 들립니다. 네 분수를 알아 네 자리에서 네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완전 고용을 위해, 모든 이들의 완전 구원을 위해 흡사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끝까지 기다리는 주님을 연상케 하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에 충실하며 제대로 살았던 정주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나 이 짧은 생각의 사람은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판관기의 요탐의 우화가 깊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역시 악순환의 반복의 인간 역사를 보여줍니다. 어제 기드온 판관의 등장으로 좋았던 분위기가 아비멜렉 임금 독재자의 등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백성이 자초한 재앙으로 우리의 현실을 연상케 합니다.
요탐의 우화에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로 상징되는 이들은 자기 분수를 알았기에 절대 임금이 됨을 사양합니다. 이래야 맞는 것입니다. 반면 가시나무로 상징되는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례한 대책 불가능한 아비멜렉은 제자리를, 제역할을, 긍극적으로 자기를 몰랐습니다. 절대로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살았어야 할 백해무익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비멜렉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선택으로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참 유익한 공부가 되는 예화입니다. 제발 이런 악순환의 반복은, 이런 공부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포학하고 무지한 지도자 잘못 뽑으면 "판도라의 상자(판도라가 열지 말라는 뚜껑을 열었더니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재악이 뛰쳐나와 세상에 퍼지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았다는 그리스 신화의 상자)"가 열리듯 지옥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배도 바다의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중이 바다라면 지도자는 일엽편주(一葉片舟) 배와 같습니다. 민중의 바다가 노호하여 태풍처럼 휩쓸면 배는 흔적없이 사라짐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참된 지도자라면 겸손히 공동체의 의견을 경청하여 공동체의 뜻에 따라, 민심에 따라 자비롭게, 지혜롭게 공동체를, 공동체의 성원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분수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 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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