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22. 정직하여라 / 갈릴래아 활동기[2] / 부스러기 복음[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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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08-23 | 조회수28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2. 정직하여라(마태 5,33-37) / 공관복음[47] 율법은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지만, 예수님께서는 아예 언제 어디에서든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 하신다. 일단 믿고 보는 그 믿음의 단순함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맹세 의식 그 행위가 필요 없다는 거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진리 그 자체이신 그분께서 이미 우리의 진실성을 보시기에, 결코 맹세 같은 그런 의식을 강요하지는 않을 것이라나.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피조물 같은 것을 두고 맹세하게 함으로써, 그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게 만들 수도 있단다. 어쩌면 이렇게 세상의 피조물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이 모든 것의 창조자이신 그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영광을 오직 하느님 그분께만 돌려드려야만 한다. 이렇게 율법은 거짓 증언을 막기 위해 맹세 의식을 세워, 거짓 맹세를 하면 벌이 따르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믿음은 맹세가 아예 필요 없게 한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금한다. 이는 우리가 피조물을 그 자체 이상의 영광을 지닌 존재로 여기지 않도록 할 이유에서다.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자.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한다. 오직 당신 자신만의 영광을 두고 맹세하라나. 예수님께서는 심지어는 자신에게까지 맹세를 말라신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를 섬기면서 자신을 뽐내기 때문이라나.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밝히시며,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머리를 두고 한 맹세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됨은 물론, 하느님마저 당신의 작품을 어느 누구에게도 결단코 넘기지 않으실 뿐이시란다. 사실 믿음은 실제로 우리 삶의 내용을 정해준다. 속이려는 마음 자체가 없을 때는, 말하고 듣는 것이 단순해질 수밖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단순함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굳이 맹세 의식 자체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시고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우리라지만, 그나마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는 하라신다. 과연 이 ‘예.’와 ‘아니요.’는 맹세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이 단순한 ‘예.’와 ‘아니요.’는 맹세 이전의 ‘모자람’이다. ‘지나침’이 아닌 겸손이요, 정직함이다. 더도 덜도 아닌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의지의 최소 단위이다. 죄의 범주인 악이 미치지 않는 마지막 경계선이다. 이 선을 넘으면 악이요, 죄다. 모자람이 아닌 확실한 지나침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와 ‘아니요.’의 선까지만 허용하신단다. 그 이상은 분명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나. 여기까지가 ‘정직’이다. 신앙인의 양심을 지키는 자부심인 정직함이다. 예로부터 ‘하루를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무엇을 하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어떻게 하고, 일 년을 행복하려면 무엇을 하라. 그러나 평생 행복하려면 정직한 인간이 되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만을 충실히 믿는다는 우리 신앙인의 생활 속에는, 정직이 제자리를 잡아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투명한 수정처럼 정직한 삶을 살라시며 오늘도 우리에게 이르신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유다인의 신앙을 나타내는 특별한 표지이자 중요한 신심 행위로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을 들 수가 있다.[계속] [참조] : 이어서 ‘23. 유다인의 신심 행위(마태 6,1-8; 16-18)’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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