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Control Tow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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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병식 | 작성일2023-08-25 | 조회수29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컨트롤은 조정, 조율, 통솔, 통제의 구체적 아젠다를 품고 작용과 작동에 대한 관리의 차원이 필요한 일들을 포함하게 된다 컨트롤은 자유에 대한 문제,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문제를 필연성으로 두며 무엇인가의 활성화를 위해, 이에 따른 부작용의 발생 등에 대한 문제도 아우르게 된다대체로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 위험성이 있다고 보여지는 것들은 그런 상태를 확정지을 수 있는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이를 규정할 수 있는 결정이 있어야 하는 문제로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되어진다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실제로 많은 것들을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 유토피아의 이상과 행복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은 의도한 대로도, 계획한 대로도, 마음대로도, 생각한대로도 거의 되진 않는다 삶은 그렇게 비효율이 넘치고 비효과적인 경우들도 많다 비효율의 상대성은 모순이란 말이 신랄하게 나태내 준다 같은 전제와 조건을 두고 경쟁하는 두 성격은 한 가지 아젠다를 충족시켜야 할 의의도 똑같이 동일하게 갖는다 만약 축구 게임이라면 그 한가지 아젠다는 빅토리라고도 할 수 있고 공격과 수비의 룰은 두 팀에게 다를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그런 게임들보다 더욱 더 신랄하고 공포스럽고, 위험천만하며 불안감을 극대화시키는 리얼리티와 오컬트가 난무하는 가공스럽고 때론 그러함이 너무 심해 가상스러운 실제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현실과 꿈의 경계가 모호한 데미지와 트라우마가, 스트레스가 극심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사람들에게는 어떤 충동들이 강력하게 솟구쳐 오르는 상태들에 빠지는 경우들이 나타나는데 그 지점에 이르면 이미 self-control 이라는 영성의 작용은 이미 심각하게 무너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 스스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또는 군중 전체를 움직이는 어떤 그로기 상태는, 항상 그 상태가 최종적이라는 종지부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인간성이나 세계성의 어떤 기준이나 경계에서 어느 편에 더 가깝고 어떤 쪽에 더 기울어져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고 잘 알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런 모든 사태나 사건, 사고에서는 항상 역사적 평가 방식으로 그 모든 일들의 진위나 성격 같은 것들을 결과론적으로 재고 재단하는데 당시에는 모든 것이, 모두가 다들 그 충동의 실태나 그 흥분과 격동의 도가니에 빠지고 아우러져 실제 상태를 제대로 알고 느끼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모든 것에 대한 직관은 그로 인한 모든 신적 행위와 역사를 진실하게 하는 성격이다 사람들처럼 진위에 대한 판단이나 파악을 위한 행위나 행태를 더해야 하는 지성의 어두움에 대한 보완이나 보조가 필요없고 그 보완과 보조에 대해서도 그 진실성이나 타당성을 따질 필요도 없는, 누군가나 어떤 것의 도움이나 협력을 더해 완전해지거나 완전하게 만들어질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런 신적 성격은 사람들이 믿어야 할 하느님의 본질과 성격, 전능함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각오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그 진리의 진실이나 진위를 감히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들은 그 이해도, 그 실천도 그러한 신앙에 따른다 그것은 온전히 사람들의 신앙의 진실과 그 정도에 따라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간성의 실현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 인간성을 세상을 살며 이루어 나가듯이 말이다 그런 인간성의 스펙트럼은 색이 인지되도록 하는 원리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것과 같다고 그게 다 맞다고 할 수는 없는, 영성과 의식과 심리를 내포하는 인간성이 단지 자연적 원리와 같다고만 할 수도 없고 단지 그런 원리에 빚대어져 그 상태나 현상을 이해하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컨트롤은 자유와 관리, 이 두 가지 아젠다에 실제 컨토롤 본연의 의의를 두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통솔이나 통제, 제한이나 제제와 같은 의식적 작용들은 관리의 범주에서 벗어나 그것들 자체의 의의로 실체를 제도하거나 재단할 수 없고, 자유에 입각하고 입장한 존재의 실체라면 더더욱 그것들만으로 주되게, 또는 주제 삼아, 주도적으로 그 실체의 어떤 부분도 그것들 임의나 그것들이 지배적인 방식으로 조각되거나 나아가 조형되어서도 안 된다 컨트롤 또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그 명분과 사유를 조작하여 독선과 독단과 독재를 조장할 수 있는 대의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런 시대의 참상과 참극은 역사 속에서도 그 가공할 진상들과 내막들이 숱하게 많다 그것은 얼마나 자의를 다하고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가, 얼마만큼 수용하고 복종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결코 아닌 것이다 합의와 공감, 약속과 계약은 인간성의 차원에서 보여줄 수 있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인위와 인본을 근간으로 삼는 세계성의 실현을 상호 간에 실천 지성과 실천 의지로 두고 있는데 그 작용과 작동의 양상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습들은 그 진위를 잘 알지 못하는 한 언제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릇된 오류와 왜곡이 짙은 오해와 착각으로 판단될 수도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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