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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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8-26 | 조회수28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의 신앙생활은 ‘율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율법을 얼마나 철저하게 잘 지키는가에 따라 그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사는 의로운 사람인지, 아니면 하느님 뜻을 거스르며 사는 죄인인지가 판가름 났던 겁니다. 자연스레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이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하게 되었고, 율법의 세부조항까지 철저하게 지켰던 바리사이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철저하게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만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정작 본인은 스스로가 말한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드려내려고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위선’을 떨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들이 몸에 달고 다니던 ‘성구갑’과 ‘술’이었습니다. 성구갑은 구약성경의 핵심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넣은 작은 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는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께서 내리신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노력하겠다는 결심을 되새기려는 것이었지요. 물론 그 의도 자체는 참으로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달고 다니던 성구갑이 유난히 크고 화려했다는데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자주, 쉽게 띄었습니다. 본인 입으로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여러분 이 멋진 성구갑을 한 번 봐주세요! 내가 하느님 말씀을 얼마나 자주 되새기고 묵상하는지, 내가 성경 말씀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옷에 달고 다니는 게 아닙니다. 그분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해야 내 모습과 삶이 그분 뜻에 맞갖게 변해가는 것이지, 그저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아무 것도 바뀌는건 없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몸으로는 하느님 말씀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았기에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의로운 ‘척’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면서, 자신이 그분 뜻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 모두를 속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말씀과 뜻에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 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해와 용서, 양보와 배려, 희생과 선행,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영성 깊은 신부님이 하시는 강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자기 삶이 거룩해진 듯한 착각에 빠져 산다면, 어느 순간 주님께서 그런 나를 가리키며 ‘얘야, 저 사람처럼은 살지 말아라’고 말씀하시는 가슴 뜨끔한 상황을 맞게 될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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