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해 연중 제21주일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데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 이유는….> 복음: 마태오 16,13-20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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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는 눈을 지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보는 눈, 곧 믿음은 우리 능력이 아닌 성령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하늘 나라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죄가 용서되면 다시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곧 성령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이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곧 내가 죽지 않으려 하는 이는 성령을 받아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며 죽기를 거부하여 교회에 주어진 죄를 사하는 권한을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베드로는 자기 뜻을 죽이고 물 위를 걷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분 주고 받느냐의 수를 세느라고 정신이 팔려 그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욕망이 한쪽에 빼앗기면 다른 것은 볼 수 있는 힘을 잃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믿으면 하느님을 믿을 힘을 잃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집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하느님께 한 번만 세상을 보고 싶다고 소원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부엉이 한 마리를 불러 낮에는 눈이 필요 없으니 그 소경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게 된 소경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밤에도 눈을 부엉이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부엉이는 먹이를 먹을 수 없어 죽었고 그때 소경의 눈은 흐려지다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내 안에 성령께서 살아나십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살아나는 만큼 교회의 성사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체를 영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본성에 사로잡혀 성령의 불이 꺼지고 맙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자신이 차지하여 스스로 주(인)님이 되고 선악과를 먹어(육체적 욕망) 스스로 창조자가 되며 사람을 심판하여 스스로 심판관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 있는데 다른 하느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계셨습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눈을 잃었습니다. 자아를 긍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소유욕-성욕-지배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살리기 위한 욕망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이 있다면 주님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덜 가지고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뱀의 욕망과 반대됩니다. 따라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려야만 함을 압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그분께서 우리도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불러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저주와도 같습니다. 더는 돈을 좋아할 수 없고 더는 여자에 끌릴 수 없으며 더는 다른 이들보다 높아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을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잘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십자가에 봉헌함 없이 우리를 하느님처럼 만들려는 분을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PJBYFsKx7Co?si=6tUOjV3tZ6TgarJ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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