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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연중 제22주일: 마태오 16, 21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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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3-09-03 조회수455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는 어떤 모순을 체험하면서 매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모순이란, 바로 ‘왜 무죄한 아이들이 죽어야 하는가?’라는 인생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앞에 놓여 있는 현실 상황입니다. 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 방문 후 로마에 도착하시던 날, 교황님의 조카 손자 2명이 어머니와 함께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이런 사고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은, ‘왜 무죄한 아이들이 죽어야만 합니까?’라는 삶의 모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때마다 해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런 의문은 믿는 이에게나 믿지 않은 이에게 있어서 늘 같은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 고통은 근본적으로 신앙의 문제, 하느님에 대한 문제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통해서 우리, 더 나아가서 교회는 이런 의문, 곧 ‘왜 고통을 당해야 하나?’에 의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알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릴케의 권고처럼 ‘답으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문제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자세일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와 함께 살아가고 또한 그 신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본 훼퍼’ 또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난과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믿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인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놀라운 우리의 자가당착이며 그릇된 환상입니다. 이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서 ‘고난을 통한 구원’, ‘십자가를 통한 부활’에로 주님과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며,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 없이는 주님도, 참된 사랑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면서,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16, 22)고 충언(?)합니다. 왜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강경하게 스승의 뜻에 반기를 들고 스승의 뜻에 제동을 걸고 무산시키려 하였을까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200주년 성서에 보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끌어당기며 예수님을 꾸짖었다.” 이로써 스승이신 예수님의 뜻을 꺾고 본인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베드로 사도의 의지를 볼 수 있는 실례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토록 강력하게 반기를 든 까닭이란 다음 아닌 베드로 사도의 ‘메시아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생각은 단지 베드로 사도만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 그리고 당대의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메시아 사상’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자, 영광스런 왕좌에서 통치하는 영광과 현세적인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사조였습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16,16) 라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한 그의 심중에는 자신에게 하신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들이 현세에서 이루어질 영광과 승리의 표지로 굳게 믿었으며, 그런 상상 속에 어쩌면 도취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기에 느닷없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죽임을 당하신다’고 하니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 무슨 소리인가! 이렇게 자신의 위대한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고 스승이신 주님께서 선언하시니 그 순간 베드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인간은 자신이 늘 꿈꾸었던 이상과 현실이 너무나 다를 때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심리를 품고 있으며, 아마도 이런 심리상태가 베드로 사도의 심리상태(=멘붕)였을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은 베드로 사도의 예수님에 대한 눈먼 사랑,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죽어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심에 침잠되어 있는 고통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에서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충동에서 거부하고 반박한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스승의 의도에 대한 깊은 숙고나 성찰 없이 베드로 사도의 감정적인 반응과 강렬한 부정의 말과 몸짓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붙들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16, 23)라고 질책하십니다. 지난주 복음과는 전혀 다른 전개이고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질책하신 말씀 중에서 정말 중요한 지적은 단지 베드로만이 아니라 우리가 귀 기울여 듣고 마음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요인은 ‘세상의 많은 일들을 인간적인 측면과 관점에서만 늘 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스승의 뜻에 반기를 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속마음은 하느님 시선, 신앙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곧 베드로 자신의 시선과 관점에서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해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늘 사람이란 늘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늘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살려는 경향이 강하잖아요. 즉,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하는 마음보다는 하느님의 뜻마저 자신의 방식과 세속적인 이해득실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스승의 걸림돌이자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사탄의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때 왜 내가 그랬지!’ 이런 표현을 한 적이 있잖아요.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우리는 하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부족하고 모자란 인생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거나 자학하지 말자고요. 

참으로 어려운 제안이지만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성서에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통과해야 하는 것은 ‘거짓된 신상과 그릇된 하느님의 이미지’를 깨트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살아가기 위해서 거짓된 신상을 깨트릴 때만이 베드로와 같은 자기모순과 착각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일, 하느님의 뜻을 우선해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은 늘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 편견, 착각, 교만함 속에 살 수밖에 없고, 하느님 중심적인 신앙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속내를 꿰뚫어 보시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16, 24)고 말씀하셨으며, 이렇게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본인의 생각이나 계획 등을 내려놓고 버릴 때, “참으로 생명을 얻게 되리라.”(16, 25)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 또한 덧붙이십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에게는 십자가는 하나의 투박한 나무 조각이고, 회피하고 싶은 어리석은 것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능력이고 힘입니다. 그러기에 고통은 무익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의 고난에 동참이며, 성장과 변화에로의 초대이고, 회심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믿지 않은 이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저의 경험에서도 때론 고통은 은혜이기에 ‘고통을 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고통은 거짓된 자아의 가면을 벗기고 실제의 나를 직시하고 직면하게 하며 참된 자아를 발견하게 하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너무 벅차 하소연합니다. “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20,9) 이렇게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살다 보면 분명 예레미아 예언자처럼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고, 조롱당하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참된 자기를 찾고 참된 생명을 누리기 위해 겪어야 하는 것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참으로 하느님 안에서 성장하고 변화되면서 차츰 하느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되는 게 인생인가 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 누구보다도 시련과 환난과 박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바오로 사도의 중심적인 복음 선포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 신학’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필3,10) 이토록 사도 바오로는 매일의 삶을 그러기에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일상의 모든 것을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드리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일부러 고통을 만들고 희생하기보다 일상에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어려움과 힘듦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12, 2)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의 일과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적으로 실행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던 미국인 봡 멕카일 신부는 그곳 방글라데시의 무슬림 신자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 무얼 주겠냐는 질문에, “당신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통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봡 신부의 대답은 비록 짧은 표현이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며 정수인 ‘십자가의 신비’를 온전히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이 앞서가신 십자가 길을 묵묵히 따르려는 저희를 통해 저희와 함께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저희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지혜를 허락해 주시고, 기꺼이 오늘 저희가 겪을 어려움과 힘듦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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