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가해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지도자는 새벽마다 삼고초려 하듯 기도해야!> 복음: 루카 4,38-44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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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파르나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느닷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고 당신을 찾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 곳으로 가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가신 이유를 압니다. 바로 기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새벽 기도 안에서 오늘 당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이 된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만약 기도도 안 하고 떠나겠다고 하셨다면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덕쟁이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이 기도를 통해 듣게 된 하느님의 뜻임을 느끼면 그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한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는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가 갈라지고 허물어집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 만으로 공동체를 이끌려면 공동체가 분열되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열 시켜 자기 자리를 유지하려 하기도 합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는 한겨울에 한 아파트만 빼고 모든 건물이 무너진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그 유일한 아파트로 몰려와 몸을 녹이고 음식도 나누어 먹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이병헌을 중심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병헌도 그 아파트 주민이 아니었습니다. 주민에게 꾼 돈을 받으러 왔다가 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굶어 죽고 얼어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병헌은 자신이 아파트 주인인 것처럼 보이려고 도를 넘으며 행동하다가 결국 대표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을 밖으로 내몰고 자신들만의 천국으로 만들어갈 때쯤 이병헌이 아파트 주민이 아님을 아는 한 여자아이가 들어옵니다. 그렇게 공동체는 의심으로 분열됩니다. 나중에 자신이 아파트 주민이 아닌 것이 들통나자 이병헌은 그 아이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며 그 아이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다시 일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렸습니다. 공동체는 와해 되고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빼앗겨버립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에 의해 어떤 자신들보다 초월적인 능력이 있어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는 지도력을 잃게 되고 그러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와해됩니다. 이병헌은 자기 능력으로 공동체를 이끌려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되는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이 새해만 되면 용하다는 무당을 찾을까요? 왜 예전에 모든 왕이 자신들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려 했을까요? 자기 힘 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끌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시골 흑수저 출신에서 초나라를 세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우와 장비, 조자룡 등과 같은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싸우며 50이 넘도록 도망 다닐 때는 그의 지도력이 오직 그의 덕에만 의존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이들도 끊임없는 패배 속에 지쳐가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는 능력을 지닌 자의 뜻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춘 이가 제갈공명이었습니다. 작지만 한 나라를 세우려는 이가 시골 선생인 공명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삼고초려’입니다. 유비는 이렇게 천체의 신비까지 읽을 줄 안다는 제갈공명을 전략가로 삼아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모든 이가 힘을 낼 수 있었고 그 이전까지 두 번 싸워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던 것이 이젠 승률이 80%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공동체가 하나가 되려면 같은 지향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기찻길의 두 선로가 목적지까지 함께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목적지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지향과 목표는 분명 한 사람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들과 같은 부족한 인간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하며 얼마나 많은 약속을 어깁니까?
예수님께서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모습을 제자들도 보고 군중들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일부러라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한 인간으로 보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이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치의 중심이 나여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그 경외심이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사제가 새벽에 기도하면 신자들은 어느 정도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분명 주님의 뜻을 묻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제의 결정에 반감을 품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렇게 본당에 일치가 이뤄집니다. 그러나 사제의 결정이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여겨지면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새벽에 기도하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아내도 따르고 자녀도 따릅니다. 일치의 중심을 나로 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음을 아침부터 보여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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