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3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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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9-10 | 조회수27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23주일 가해] 마태 18,15-20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묻지마 살인”, 공공 장소에서의 살인 예고, 너클 강간 살인 등… 우리 사회 전체가 도를 넘어 광기로 치닫는 폭력으로 인해 크나큰 아픔과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죄 없는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에 공감한 많은 이들이 가해자들을 향해 분노와 비난을 쏟아냅니다. 저렇게 나쁜 짓을 한 놈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지금보다 훨씬 더 단호하고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와 상처를 입히는 ‘악인’들을 공동체에서 완전히 격리하여 파멸시켜야만 비로소 우리가 사는 사회에 정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라’고 하신 하느님 용서와 자비의 말씀은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린 듯 합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를 분명히 가르칩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이를 보면 그가 그런 짓을 계속하여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그에게 ‘회개’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고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우리 하느님은 악인이 멸망하기를 바라시지 않고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분이니, 그분 자녀인 우리도 그런 하느님의 뜻에 동참해야만 하는 겁니다.
사랑은 자비와 용서로 악인을 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과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불의와 거짓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인내하기만 하는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 관련된 이들 사이에,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 마련이지요.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소중한 관계를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서 때로는 죄 지은 이들을 엄하게 꾸짖고 인내와 정성으로 가르쳐 그들이 잘못을 바로잡고 회개하도록 이끌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랑의 원칙이 오늘 제1독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아주 중요한 소명을 맡기시지요. 이스라엘 집안에 하느님의 뜻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특별한 예언자 몇 사람에게만 맡겨진게 아니라, 하느님을 믿고 섬기며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악인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여 올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악한 길에 머문다면 그가 파멸하는 것은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움과 원망, 이기심과 개인주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에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소홀히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악인을 구원하지 못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겁니다. 우리가 그분 자녀이기에, 큰 은총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죄 지은 이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사랑의 소명을 강조하십니다. 누군가가 죄를 지어 나에게 상처와 피해를 입혔다면, 먼저 그와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정확히 그가 한 어떤 말이나 행동이 내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로 인해 상처입은 내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솔직히 말할 용기도 의지도 없으면서,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입장만 하소연하여 그를 공개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가 회개하기는 커녕 더 나쁜 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억울함과 분노를 유발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죄책감이 자기합리화로, 후회가 완고함으로 바뀌면 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러니 먼저 그를 조용히 만나 타일러야 합니다. 그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그가 한 어떤 말과 행동이 나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그로 인해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다는, 너와 맺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진심을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자기 모습과 삶을 성찰할 기회를, 잘못을 바로잡고 보속할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내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고 싶은 ‘방어기제’가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동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처받은 네가 유별나고 예민한거라는 식으로 남탓과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게 되지요. 그럴 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와 나 사이의 문제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조언해줄 증인의 역할을 맡기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충고와 조언을 통해 나에게 잘못한 그 사람은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객관적으로 성찰해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나는 내 마음 속 상처를 객관적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상처 그 자체에 매몰되어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상처의 본질과 원인을 정확하게 확인하여 그것을 극복할 길을 찾게 될 겁니다. 그러니 그와 나 서로에게 윈윈이지요.
그러나 잘못을 바로잡을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저지른 잘못이 크고 무거울수록, 자기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커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상황 자체를 부정하려고 들지요. 그럴 땐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법원을 찾아가 고소하지 않고 교회 안에서 해결하려 하는 것은 그가 나와 같은 하느님을 믿는 내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에 알린다는 것은 그의 잘못을 교회의 직권자에게 고발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를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을 교회의 공적인 처분에, 즉 하느님 손에 맡기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긴다는건 그를 교회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하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처분인 ‘파문’ 제제를 뜻하지요. 파문은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한 이가 회개할 때까지 신자 자격을 정지시키는 일입니다.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화해 예식을 통해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고 적반하장식으로 나오더라도, 그와 나 사이의 갈등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아 그와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보여도, 최소한 그와의 관계 자체를 끊어버리지는 말라고, 그를 죽을만큼 미워하고 원망하여 내 삶 바깥으로 완전히 밀어내 버리지는 말라고 우리를 다독이시는 겁니다. 내가 그를 주님 손에 맡겨드리고 그를 향한 마음의 창만 닫아버리지 않는다면 화해의 가능성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그 순간,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은 오직 기도의 힘으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이나 셋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를 혼자 바치면 자신이 원하는걸 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많은 이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면 다른 사람을,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를 바치게 되지요. 그 때 자연스레 주님 사랑의 품에서 멀어진 그 사람을 위해,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그가 처한 입장과 상황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을, 그의 영혼 속 상처에 함께 아파하는 따뜻한 마음을, 그와 나 모두가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넓은 마음을 갖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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