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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행복의 법칙은 유일하고 예외가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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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백봉7 쪽지 캡슐 작성일2023-09-13 조회수55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3년 가해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행복의 법칙은 유일하고 예외가 없음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복음: 루카 6,20-26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비결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가난해야 하고 배고파야 하며 박해 받아 울게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완전 자기학대 수준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법칙이 예외 없는 유일한 행복의 길임이 확실하다면 누구든 그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 법칙을 믿을까요? 누가 행복해지기 위해 가난해지며 행복해지기 위해 단식 하며 행복해지기 위해 멸시와 박해를 찾습니까? 우리는 먼저 이 행복의 법칙이 유일하고 예외 없는 법칙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왜 더 가지고 배부르고 인정받기를 원하면 행복하지 못 한지부터 이해해봅시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세속-육신-교만, 곧 삼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세속인데 이를 청빈으로, 육욕을 단식으로, 교만을 겸손함으로 이겨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단계를 받아들이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왜 자살과 마약 중독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나라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고 미국 사망 원인 1위는 마약 중독이라고 합니다. 사실 자살이나 마약 중독이나 원인은 다 같은 데서 출발합니다. 생존 욕구가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강해지면 행복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추구하지만, 욕망에 비해 채워지는 것은 미흡합니다. 이 고통이 너무 커서 자살이나 마약으로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행복을 위한 호르몬 조절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아기를 낳는다면 그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엔도르핀이 솟구칩니다. 이러한 자연 진통제가 없다면 우리는 고통을 감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마약과 같은 것으로 고통을 줄여주면 어떻게 될까요? 몸은 더는 엔도르핀을 내보내지 않게 됩니다. 지나치게 환각에 빠진다면 현실 감각을 잃고 그 쾌락에만 집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망가집니다. 
문제는 마약과 같은 쾌락을 주입하지 않을 때 벌어집니다. 이미 망가진 시스템 때문에 평소에 호르몬 때문에 잘 견뎌냈던 것들이 참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 하고 더 먹고 더 강해지려 합니다. 이것도 안 되면 자살로 도피하거나 약물 과다 복용으로 마지막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러한 생존 욕구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창조자를 만나지 못 해서 입니다. 부모에게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 부모의 부재보다는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해서, 강하지 못 해서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그런 것들에 더 집착하게 되고 그래서 더 큰 욕망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십니다. 일부러라도 그러한 욕망과 싸우면 우리 행복 조절 시스템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행복 호르몬을 더 많이 분비하게 됩니다. 운동으로 몸을 괴롭혀주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만들려고 마치 마약과 같은 쾌락 호르몬을 분비합니다. 그러면 잠깐 고통을 주는 것으로 오랜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쨌건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고통은 호르몬의 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행복해지려면 마약과 같은 것으로 고통을 줄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고통을 주어 행복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지나치면 얀세니즘처럼 쾌락을 위한 고통 추구만을 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더 가난하고 더 배고프고 더 멸시와 박해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 행복 호르몬을 증가 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몸에 고통을 주어 생겨나는 행복 호르몬의 양은 우리가 그 고통을 감내하기 위한 최소한만 분비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호르몬 중독에 빠져서 운동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운동만 하게 될 것이고 단식 하는 사람은 계속 굶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간당간당하는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시 이전의 빠른 보상을 찾게 되고 그러면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한 행복 추구보다 더 큰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동기가 바로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 무일푼에서 순자산 8천억에 이르는 성공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자신들을 부유하게 해주었던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해지자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은 생각처럼 벌려지지 않았고 그 고통을 마약으로 치유하려 하였습니다. 차츰 마약의 양이 많아지고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약 치유 센터에서 치료 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적인 공허감은 채워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매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를 치유해 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가 중독 치료를 마치고 나오는 날 그의 담당자는 그에게 인격 모독과 같은 발언을 합니다. 바로 “당신은 어차피 또 들어올 겁니다. 당신은 절대 마약을 끊지 못해요!”라고 단언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오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에 집착하게 됩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에 집착하다 보니 마약은 손도 안 대게 되고 건전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집착의 법칙』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을 건전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준 것은 성공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성공에 대한 집착의 근저에는 자신이 루저가 아니라는 자존감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삼구의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집착, 곧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으면 더 가지려 하고 더 먹으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하는 마음은 매우 어색해서 더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저절로 예수님처럼 가난해지게 되고 덜 먹게 되고 멸시와 박해를 즐겨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작용으로 오는 행복의 쾌감으로 언제나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행복의 법칙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예외를 두지 않으십니다. 무엇을 따르려면 그것이 하나의 법칙이고 예외가 있을 수 없음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고쳐줄 수 있는 행복의 엔지니어, 혹은 행복의 의사나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되려는 집착을 가져봅시다. 어차피 하나에는 집착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탐욕이든 사랑이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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