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예찬
-한반도의 십자가-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시 사제와 회중이 주고 받는 아름다운 곡이 생각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습니다. 9월부터의 가을은 수확의 계절임과 동시에 기도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로사리오 성월, 11월 위령성월에 이은 대림시기, 그러다보니 1년이 성큼 지난듯 합니다. 참으로 깨어 간절히 기도해야할 총체적 난국, 총체적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한국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참 반갑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기도중 가장 짧으며 가장 좋은 기도가 <가톨릭 기도서> 맨처음에 나오는 성호경일 것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십자 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게 되었고,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합니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은 9월 14일로 고정됩니다. 오늘 역시 집무실에 들어오자 마자, 그리스도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성호경과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을 하고 성가처럼 애국가 1절을 부른후 하루를 시작했고 이어 쓰는 매일 묵상글 강론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참 절박한 기도입니다. 어제 모일간지에서 미국 캔자스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에이드리언 루이스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공감했습니다.
“한국은 다극주의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다. 미국이 한쪽 편을 들라고 강요하더라도 이를 맹목적으로 따를 필요는 없다. 기억할 것은 한국은 주권국이란 사실이다. 균형을 갖춘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것을 안다.
자국의 안보를 동맹에 의존하는 것은 최근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략 접근법이 아니다. 미국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지켜준다고 약속하고선, 나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철수했다. 미래에 한국에서 미군 철군과 같은 상황이 오는 것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에 모든 걸 의존하는 것은 온당치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미국을 온전히 믿지 마라. 심각한 실수가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문도 열어놓아야 한다. 초강대국이 개별 국가의 안보를 대리해주는 시대는 1950년대가 마지막이었다. 자국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길 수는 없다.
미국은 전쟁하는 나라다. 지난 200년간 역사에서 단 16년만 전쟁을 하지 않았다. 최대 무기 생산국이자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의 연간 군사비는 중국, 러시아를 포함한 나머지 2-10위 군사비 합한 것보다 훨씬 많다. 미국에게 전쟁은 비즈니스이다. 미국 외교-국방 기조로 볼 때, 앞으로도 절대 ‘평화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래서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도우심뿐이 답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참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십자가 주님의 지혜와 보호 은총이 각별히 요청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답은 기도뿐이요 고맙게도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가을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며 기도할 대상인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분단된 한반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한반도의 무거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함께 지고 가심이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며 불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신의 벌로 불뱀들에 물려 죽어가자 모세는 기도했고, 이어 그들은 모세가 만든 기둥 위에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 위에 달린 구리 뱀이 상징하는 바,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한결같이 일편단심 사랑하고 바라봐야 할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느님을 믿는 신자들이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좌표가, 삶의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하겠는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 십자가의 도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이자 도반이 되십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표지가 되고, 희망의 표지가 되고, 영적승리의 표지가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다시 용기백배 힘을 내어 살게 됩니다.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이 샘솟습니다. 백절불굴의 믿음도 십자가 예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길, 하늘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니코데모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대로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임을 천명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사랑해야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 화해와 평화의 상징도 됩니다. 어제 저녁성무일도중 콜로새서의 그리스도 찬가중 마지막 대목이 생각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19-20)
이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인류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시야를, 이해 지평을 하느님 수준으로 넓혀야 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행복이 선택이듯, 믿음도, 구원도 선택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늘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있는, 믿음의 선택으로 누구나 갈 수 있는 구원의 문, 구원의 길,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중의 복음이 더욱 십자가의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새삼 십자가의 예수님은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온 세상, 온 인류에 주신 구원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더불어 이 거룩한 “미사” 역시 온 세상,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성사임을 깨닫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늘 바쳐도 늘 새롭게 느껴지는 제 좌우명 고백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