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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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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3-09-17 조회수463 추천수5 반대(0) 신고

 

-“좌파나 우파가 아닌 예수님파로 삽시다”-

 

 

"온 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그 이름의 영광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당신께 드려라."(시편66,1-2)

 

하루 시작을 집무실 예수님 십자고상과 그 아래 태극기를 보며 성호경, 영광송 기도후 만세육창후 시작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만큼 국내외 상황이 엄중하고 위태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벌써 여러번 강론에 인용했습니다만, 인용할 때 마다 새롭고 신선합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기도에 전념할 때, 그리고 일에 전념할 때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제도 여러분들의 면담성사를 드렸고 보속으로는 예외없이 말씀처방전, 행복기도 읽기, 끝으로 애국가 제1절을 소리내어 부르도록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 나라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습니다. 애국가가 성가요 기도임을 새롭게 발견한 요즈음입니다. 역시 나이에 상관없이 정성을 다해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들은 참 경건하고 아름다워 감동적입니다. 언제 들어도 감동적인 애국가 1절 다시 인용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어제 10년만에 피정차 왔다는 80대 자매와 고백상담전 나눈 대화도 생각납니다. 본당 신부님이 노골적 좌파신부라 참 싫다고, 그런데 요셉 수도원에 참 좋은 우파 신부가 있다고 동료 자매가 크게 설득하는 바람에 피정왔다는 자매님 말을 듣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수도사제입니다! 좌파와 우파를 함께 아우르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파’입니다.”

 

혹자들은 간혹 우리 교황이 좌파가 아닐 까 의심하는 자도 있겠지만, 예수님파의 원조는 분명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일 것입니다. 만세육창후 하루를 시작하는, 하루에도 자주 만세육창을 하는 저는 누가봐도 예수님파일 것입니다. 예수님파라 대답한 것이 참 잘했다 싶었고, 더욱 예수님 공부 많이하여 예수님처럼 살아야 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했습니다. 마침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 1면 사진과 말씀이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한국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마티아 주교님이 바티칸에 설치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상을 교황님께 드리는, 그리고 반갑고 경건한 모습으로 웃으며 김대건 안드레아 상을 받아 안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어 교황님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희망으로 온갖 분열과 장벽을 극복할 것을 격려하셨습니다. 한국신자들 좌우를 막론하고 누구나 존경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참 예수님파입니다.

 

누가 극단의 좌파도 우파도 아닌 참 예수님파 신자들입니까? 어떻게 참 예수님파 신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 자비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화답송 후렴, “주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시도다.”도 이와 일치합니다. 

 

첫째,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용서하는 사랑은 신적 사랑입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무한한 용서를 하라는 말씀에 이어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다시 이를 강조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주시는 말씀이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고 무한정, 숨쉬듯이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하늘나라의 비유입니다. 임금에게 만탈렌트 빚을 탐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고작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냉혹한 처사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은혜를 망각한, 참으로 무지에 눈이 멀어 자기를 모르는 우리 인간의 부정적이자 보편적 모습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같이 하실 것이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무한히 자비로우라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각자 하느님께 받은 무한한 용서의 사랑의 빚을 깨닫는 다면, 이웃의 나에 대한 죄나 잘못은 조족지혈鳥足之血 새발의 피요, 저절로 용서요 자비로운 삶이 뒤따를 것입니다.

 

둘째, 화내거나 성내지 않는 사랑입니다.

물론 예언자들과 같은 사회적 불의에 대한 공적 분노는 예외입니다. 오늘 집회서에서 주님은 사적 분노와 진노, 복수심을 과감히 내려놓을 것을 권합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을 고스란히 인용합니다.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말그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지혜요 자비로운 삶의 구체적 실천지침입니다. 정말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다면, 분노, 진노, 격노, 성냄, 화냄, 복수, 적개심, 얼마나 백해무익한 영혼을 망가뜨리는, 후회로 가득 채우는, 무지한 행위들인지 깨달아 저절로 떨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심판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교만한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심판하지도 않습니다. 제 분수를 넘는 일이 남 판단하는 일이요,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일체의 판단도 심판도 보류하고 하느님께 맡깁니다. 

 

주님께 구원받아 은총으로 살아가는 주제에, 사랑하기에도, 감사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이요 할 일은 한없이 널려 있는데, 한가하게 누가 누굴 심판하거나 단죄합니까?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형제를 심판하지 마라”는 주제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독서는 여기서 끝납니다만, 이어지는 내용이 보완되어야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로 인한 심판이요 판단이요 정죄입니다. 역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좌파도 우파도 아닌 끊임없이, 한결같이 자비를 실천하는 예수님파로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용서하는 사랑, 화내거나 성내지 않는 사랑, 심판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날로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파 신자들의 구체적 자비로운 삶의 실체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자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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