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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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9-17 | 조회수41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루카 9,23-26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시(視)와 견(見). 우리말로는 둘 다 ‘보다’라는 뜻입니다. 시(視)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수동적인 봄’입니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쳐지는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텔레비전을 시청(視聽)한다고 하지요. 이에 반해 견문(見聞)을 넓힌다고 할 때 견(見)은 단순히 눈에 비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저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모험입니다. 모험은 언제나 두렵지만 그것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하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용기를 내어 도전하게 되지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모험에서 그 희망을 지탱해 주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법입니다. 희망을 찾기 위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조건들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도 당신 앞에 닥쳐올 고통과 죽음이 두려웠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지상에서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걸으신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념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요즘 세상에서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혹자는 순교를 불확실한 내세의 삶에 대한 애착으로 소중한 현재의 삶을 포기하는 사이비 종교의 ‘광신’(狂信)행위와 동일시하여 그 무책임함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소중한 가치인데, 신앙이라는게 종교적 신념이라는게 정말 그 생명을 저버릴 정도로 중요하냐는 겁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사랑하는 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섣부르고 성급한 판단으로 순교를 택한게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 사랑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신앙을, 자신을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나를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그분의 신뢰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순교를 택하면 그저 육신의 생명을 잃을 뿐이지만, 하느님을 저버리면 모든 것을 잃게 됨을 알았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겁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을 희망한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살고 싶었습니다. 그저 ‘제대로’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 번 뿐인 소중한 삶을 부질 없는 것들에 연연하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는데에 허비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희망이 지닌 불확실성이 두렵다고 물질적인 것들에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하루 하루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만 신경쓰는 이들은 죽음으로 그 육신이 소멸되고 나면 더 이상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에 자기 자신을 매어둔 탓에 그 물질이 소멸될 때 함께 사라져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러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랑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마음 속에 간직한 이들은 육신이 소멸하더라도 계속해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한 덕분에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힘입어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 즉 물질적인 것들에 집착하며 그저 ‘생존’하는데에만 연연하는 사람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생명을 잃고,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 즉 사랑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희생과 죽음까지 기꺼이 감당하는 사람은 죽음 이후에도 주님과 함께 참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최우선으로 챙겨야 할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불행한 사고를 당하면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으로, 큰 고통을 겪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하느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실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지요.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어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려는 당신 뜻을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무엇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포한 겁니다. 하지만 그런 하느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쉽게 또 자주 세상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엔 우리가 가지고 싶은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지려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굳이 환난, 칼, 박해 같은게 없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또 다른 적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그냥 다음에 하지 뭐’라는 게으름과 나태함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남들도 다 그러고 사는데뭐’라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를 죄에 물들게 만듭니다.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뭘 어떻게’라는 자기비하와 열등감이 죄에 걸려 넘어진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붙잡습니다. 그러나 일어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걷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수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에 안주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고,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고 다그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건 나에게 쓸 모 없는 것들을 내다 버리는게 아닙니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며 애착하는 것들을, 이것만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며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지요.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나의 취향과 성격을 내려놓습니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내가 바라는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나의 계획과 뜻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자기 중심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분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이 때 중요한 자세가 바로 꾸준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지면 끝나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날마다 꾸준히, 항상 새롭게, 기꺼이 그러면서도 기쁘게 끌어안고 가야하는게 ‘내 십자가’인 겁니다. 내가 주님의 가르침과 뜻을 따르기 위해 날마다 기꺼이 감당하고 희생하는 모든 일들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리고 ‘내 십자가’는 종말의 순간 나를 멸망해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게 하는 ‘구원의 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지금 주님 뜻을 충실히 따르는게 일상에서 순교를 사는 방법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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