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3년 09월 19일 화요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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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9-19 | 조회수21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3년 09월 19일 화요일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 이야기는 엘리야 이야기(1열왕 17,8-24 참조)와 많이 유사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라는 성읍에 들어서며 과부 한 사람을 만났듯이(1열왕17,10 참조), 예수님께서도 나인이라는 고을의 성문에서 어떤 과부를 만나십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었듯이(1열왕 17,22 참조),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만나신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십니다. 특히 다시 살아난 아이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는 공통된 장면에서, 두 이야기의 표현이 꽤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함에서 예수님을 엘리야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로 묘사하려는 루카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엘리야처럼 묘사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 엘리야보다 훨씬 뛰어나신 분이심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아이를 살리려고 먼저 주님께 부르짖고, 세 번에 걸쳐 자기 몸을 아이 몸 위에 펼친 다음, 다시 주님께 부르짖는 등 조금은 복잡한 치유 과정을 거치는데(1열왕 17,20-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아이를 일으키십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요청(1열왕 17,18 참조)으로 기적을 일으키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점은, 과부도, 고을 사람도, 그 누구도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닌 이들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 곧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애처로이 울고 있는 과부에게 느끼신 그 연민의 정이 죽었던 이를 살아나게 한 유일한 동기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어떤 슬픔에 잠겨 울고 있습니까? 이미 그 딱한 사정을 굽어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주님의 위로 속에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참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연민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는 이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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