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교회야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울지도 말라 (루가7,31~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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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9-20 | 조회수23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교회야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울지도 말라
(루가7,31~35) 31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가리켜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성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바로 고 마음 이 세상에서 대장 되고 싶어 하고 이름 남기고 싶어 하는 고 마음, 단단한 마음을 갈아엎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주시는 거예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그걸 자아 해체작업이라고 하고, 자기부인의 삶이라고 하고, 그 전체를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은 자기부인의 절정인 이름 없음의 삶으로 끝나야 되는 거예요. 성도의 죽음이에요. 그게. 이름 없음 점점 자기 이름에 대한 그 가치를 놓아가다가 결국에는 다 뺏기고 김종업이란 이름을 뺏기고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아들, 작은 예수라는 이름을 받아서 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터 아이들의 놀이를 들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해 주세요. 장터에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서 혼인잔치의 놀이를 하는데 어떤 아이가 그 피리 장단에 춤을 추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애곡을 하면서 장례식 놀이를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그 놀이에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가르쳐도 세상이 따라하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세상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절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그 말씀을 쫓아서 살 수가 없어요. 그걸 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리가 없잖아요? 인간들은 종교조차 자신들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종교조차 자신들의 이름과 인기와 평판과 힘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섬긴다고 하는 신들까지 이용해 먹는게 인간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철저한 금욕적인 삶 도덕적 윤리적 바른 삶 등을 내어 놓기도 하고 엄격한 종교 행위를 내어 놓기도 해요. 그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었어요. 그것이 바로 현대의 실용주의, 합리주의, 인본주의로 이름을 바꾸어 나타난 유대주의이며 율법주의인 거예요.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요.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봐요. 그리고 하느님은 자기들만 축복해줘야 된다고 믿어요. 그리고 과연 그렇게 되었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과연 그러하리라' 그렇게 살았더니 세계의 경제권을 유대인이 다 쥐어 버렸어요. 그러면 뭐합니까? 그 유대주의가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지금도 테러로 죽이고 있어요. 지금도... 그들은 서슴없이 이야기해요. 우리는 2천 년 전에 태어난 그 예수를 쓰레기처럼 버렸다. 유대교는 그를 쓰레기처럼 버렸다. 그런데 다른 종교인 다른 이방인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어서 예수교를 만들었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쓰레기처럼 버린 거처럼 이 땅에 예수교가 들어와서 우리를 개종시키려고 할 때 쓰레기처럼 죽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아직도 무서워요. 그런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이들처럼 살고 있어요.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미에 자본은 전부 유대인들이 갖고 있어요. 꼼짝을 못합니다. 자기들이 종교 행위를 하면서 아니 종교놀이를 하면서 애곡을 하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면서 애곡하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 나는 이렇게 단식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금욕적인 삶을 살아, 나는 하루에 열두 번씩 씻는데 애곡하는데, 어떤 놈이 나타나갖고 자기들의 애곡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같이 울어주지 않는 거예요. 창녀들과 술만 마시고 있어, 안식일날 밥도 먹고...그게 본문 34절인 거예요.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부정한 것과 멀리하여 이렇게 종교적으로 훌륭하게 잘 사는데 저놈은 와서 죄인들과 창녀들과 먹고 마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더라는 거예요. 애곡에 참여 안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사는 이 세상 무리들은 진화론에 근거한 역사 낙관론에 빠져 살고 있어요. 역사는 계속 진보하여 결국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라는게 역사 낙관론이에요. 마치 유대인들이 엉터리 선민사상에 빠져서 자신들의 결국은 반드시 화려한 다윗 왕국의 회복으로 끝이 날것이다라고 믿었던 것과 똑같은 거예요. 유대주의에요. 그게.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라는 자가 와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 밖의 광야에서 예루살렘 밖에서 그 성에서 나오라는 거예요. 성에서는 지금 혼인잔치가 준비되어 있어요. 왜? 선민이거든요. 예배드리면서 제사드리면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야 우리에게 이제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국이 회복될거야'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그 밖에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광야에서 '웃기지 마라 회개하라!'를 외치고 있어요. 회개하라는거 그거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리고는 메뚜기와 들꿀만 먹고 있네? 잔치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자신들은 역사 낙관론과 선민사상으로 하느님과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놈이 계속 거기다 초를 치는 거예요. 고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자 요한이 유대주의 곧 인본주의의 역사 낙관론에 초를 치면서 ‘회개해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아니면 니네는 모두다 가짜다’라고 외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교인의 역사관은 프로페틱 페시미즘(예언자적 비관주의)이어야 하는 거예요. 회개하지 않는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대.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에요. 그런데 택함을 받은 소수의 하느님 백성들 이외에는 절대 회개할 수 없다가 성경의 진술이죠.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된다? 멸망한다에요. 그래서 우리 성도의 역사관은 페시미즘이 맞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끝내 회개하지 않고 멸망할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 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힘을 갖고 싶다'라고 하면서 세상의 놀이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그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지금은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유명한 자됨을 꿈꾸며 아주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진짜 큰 자는 믿음으로 예수를 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하고 세상에 초를 치는 사람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함께 맞춰서 춤추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 이야기 바로 위에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러죠? 왜? 구약의 예언자들이 전부 뭘 준비하다가 간 사람이라 그래요? 메시아 예수를 증거하다가 간 사람이라 그랬잖아요. '메시야가 온다.' 하고 다 갔어요.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와서 '이가 그이다!' 하고 예수님을 봤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자예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큰 자의 의미가 뭐예요? 예수님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보았느냐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이에서 동행했느냐로 판단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세례자요한이 가장 작은 자다 그러죠? 왜? 교회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 안에 뚫고 들어와 있는 존재인 거예요. 그렇다고 세례자요한이 교회가 아니란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탄생이 된 교회가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큰 자인 세례자요한도 교회 중에서는 가장 작은 자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육신의 눈으로 못 봤으니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다 본 자이기 때문에 그게 큰 자인 거예요. 그 큰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유대주의가 오늘날 인본주의 실용주의 꿩잡는게 매란 뜻이에요. 실용주의는 쉬운말로 나에게 유익만 되면 괜찮다는 거예요. 실용주의 진리가 뭔지 상관없어 나에게 유익만 되면 된다라는 거예요. 합리주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아니에요! 성경이 합리적으로 해석되는게 몇 가지나 있습니까? 아니란 말입니다. 그 모든게 다 땅의 것이에요. 착하게 살아서 하느님께 칭찬받자 땅의 것이에요. 기특한 이야기인 거 같지만... 착하게 사는게 나쁜게 아니라.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지고 그 은혜를 너무나 깊이 깨닫게 되어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삶으로서의 착한 일은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내가 이 착한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기와 명성을 챙기겠다는 착한 일이 악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그게 유대주의인 거예요. 그게 율법주의인 거예요. 그게 인본주의라는 거예요. 그게 땅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바오로가 필리피서에서 이렇게 요약을 해주는 거예요. 3장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당시 교회 안에 들어온 율법주의를 가리켜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거래요. 그게.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유대주의의 마침은 멸망이에요. 인본주의에 마침은 멸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이름과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힘과 평판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아 사는 자아 숭배의 삶인 것이고, 그것은 전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며 그들이 지옥에서 멸망당할 사람이다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골로사이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해요. 3장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엣 것은 예수와 예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엣 것 인본주의 인간의 노력 열심 이야기하는 거예요)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에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어요.) 마치 공동묘지의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감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어요. '어휴 두렵다. 무섭다. 공포스럽다' 안된다 말입니다. 그게... 그 자리로 변해가는 거예요.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어. 시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늘의 시체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한 성공이나 승리 소유의 다소 이런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요구하는 율법의 행함도 무용한 것이 되고요. 시체들이 행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해요.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시체니까... 아무리 콜라병을 던져도 그 시체가 일어나서 '너 다시한번 그러면 혼난다' 이런 말 못한다 말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시체들에게는 그러한 세상의 놀이에 재미가 전혀 느껴질 수가 없어요. 가난해도 괜찮고, 못생겨도 괜찮아요. 시체는 자기 몸에 명품을 두르는 것도 시시해지고... 자기들은 살았다고 빡빡 우기는 이 좀비들에 세상에서... 성경은 분명 이 세상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러는데 자기들은 살았다고 우기니까 좀비지 뭐예요? 그게 강시지. 콩콩거리면서 다니는 강시. 그죠?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야 돼요. 공포영화나 만화영화 같은데 보면은 좀비들이 막 살아서 자기들끼리 뭐 싸우기도 하고 뭐 투표도 하고 별거 다하죠? 그때 그런거 보면서 '야 쟤 참 좋겠다 좀비들의 세상에서 대장 됐네' 그게 부러우세요?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고 세상의 애곡에 따라 울지 않는 하늘의 사람들의 삶인 거예요.
우리가 어떤 사실에 직면했을 때에 그것에 대한 반응이 줄곧 한 가지로 나오지 않잖아요? 한가지 사건에 대해 어떤 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불쾌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 자아라는 것은 고정적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동일한 사건을 직면하면서도 그 사실을 매 순간 다르게 주관화하여 인식을 해요. 그게 무슨 자아입니까? 여러분 그걸 애벌레 자아라고 한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진짜 자신의 자아가 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런 존재에요. 인간은 그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을 크고 질긴 막으로 이렇게 감싸 버려요. 그 막을 방어기제(디펜스 매커니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인간은 그렇게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애벌레 자아들을 방어기제 같은 막으로 감싸고는 이것이 나의 자아야라고 근사하게 연극하는 거예요. 이게 나야!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인간은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선행과 착한일과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 놓으면서 바로 이게 나다라고 하면 세상이 다 속습니다. '와 착한 사람 청렴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세상에 의해서 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막이 그 사람의 자아로 평가를 받고 그 자신에게도 그게 자아가 돼요. 그런데 하느님은 절대 거기에 안속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백일하에 폭로시키세요. 꿈틀꿈틀 거리는 그 구더기같은 우리의 자아 그 애벌레 자아를 폭로시켜 버린다고요. 그리고는 '이걸 갖고 너희들이 영생을 살 수 있어? 아니지? 그래서 내가 죽이러 온 거야!' 그걸 우리의 인생 동안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 신앙생활을요. 그 꿈틀거리는 애벌레 자아가 의식의 표면으로 끌려 나와 하느님에 의해 도말되는게 신앙생활이에요.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루가복음 2장에서 시메온이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한 거예요.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왜 오셨어요? 여러분이 원래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어떤 존재로 타락이 되었는지를 폭로시키려고,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 속의 애벌레 자아를 둘러싸고 있던 그 자기방어기제 그 막 그 가면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셔야 돼요. 폭로되야 돼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7,24)라는 이 고백을 매일 하셔야 돼요.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사망의 몸이라고 고백을 했다니깐요. 고대시대 때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면 그 시체를 살인자와 꽁꽁 묶어 놓는 거예요. 그 시체가 썩어가는 그 과정을 다 보면서 '아 이렇게 무섭고 더럽고 지저분한 걸 내가 계속 달고 달아야 돼! 누가 이거 좀 떼어죠' 이게 죽음의 몸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보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더니 이 사도 바울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미성숙하고 더럽고 조변석개하며 탐욕에 가득 찬 자기 밖에 모르는 진짜 자신을 폭로당해야 돼요. 그리고 그 더러운 자아로는 그 어떤 노력과 열심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절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도 처절하게 경험해야 돼요. 그리고는 그 무능력과 불가능함 속으로 뚫고 들어 오서셔 자기 배라는 이 신을 향해 꿈틀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옛 자아를 조금씩 죽여가는, 쉬운 말로 자기부인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다가 수많은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뺏기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하게 되는게 신앙생활이에요. 그게 성도(聖徒)의 육신의 죽음입니다. 성도는 죽으면서 그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다 뺏기는 거예요. 이름을 뺏기는 거예요. 옛사람을 뺏기는 거예요. 그리고 새것으로 전부 받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죽음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주인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또 빼앗기다가 결국 주인이 왔을 때 모두 다 빼앗기는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이 주인의 명령을 받들고 주인의 장사를 해주기 위해 자기 유익을 위해 아무것도 못했잖아요. 빼앗기는 삶이란 말이에요. 계속 빼앗기다가 장사해서 얻은 유익까지 다 뺏기는 거예요. 주인한테... 주인이 오자마자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뺏겨야 진짜 좋은 하늘의 것으로 채워주는 거예요. 절대 자신의 이름을 위해 호화로운 무덤자리 마련을 위해서 이 땅을 사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도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그 화려한 무덤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거 알게 되죠. 그러면 그 하느님의 은혜를 그렇게 충분히 공부하여 안 사람들은 세상이 피리를 불 때 '야 돈은 이 정도 벌어야지, 니 나이에 이정도 수준의 명예는 있어야지, 야 너 망했구나' 이렇게 피리를 불 때 혹은 애곡하라고 할 때 거기에 부하뇌동할 수 없어요! '넌 나 망했다고 하는데 뭘로 망했다고 하는거야? 돈이 좀 없어졌다고? 그거 망했다고 하는거야? '나는 아니야 그로 말이암아 나는 하느님 더 많이 알게 됐다! 난 망한거 아니야!' 애곡 안하는 거예요. 왜 세상의 힘의 원리에 쫓겨 살아요? 여러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세례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각에서 시작이 되어서 "나는 불가능한 죄인이므로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대신에 우리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것처럼 당신 자신이 저주의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정작 죽어야할 내가 살아났습니다!" 라는 복음의 이해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왜 나를 대신하여 예수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내 안에서 무엇이 죽어야 되는지를 이렇게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조금씩 죽어가는걸 경험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럼 도대체 무엇이 짤라져야 되길래, 무엇이 물에 빠져 죽어야 하길래, 예수가 죽었을까?를 애벌레 자아를 폭로당하고 그게 하나하나 예수님의 도끼에 의해 까이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실망스러워서 뭐가 그렇게 불만족 스러우세요? 뭔 불평이 그렇게 많습니까? 여러분 나만을 사랑하고, 내 가족만을 사랑하고, 내 집, 내 교회, 내 나라, 우리팀, 내 재산 이런 것만을 사랑하며 살았던 나의 애벌레 자아들을 폭격당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지어져가는거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이에요. 그 삶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기 위해 여러분의 삶에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리하여 그 모든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거예요. 다 복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여정이 있는 자들은 세상이 환호하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외로워하게 되는 거고 세상이 애곡하고 슬퍼하는 현실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렇게 심심한데 이렇게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고작 그런게 그렇게 기쁘고, 그런게 그렇게 재미있는데 이 세상에서 이름나겠다고 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겠다고 하니 너무 세상이 불쌍해졌어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 이름 남기는거 아니에요. 더욱더 털리고 비워져서 하느님이 여러분을 점령하게 해야 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하느님께 송두리채 뺏기는 삶 그 삶을 살아야 돼요. 그래서 그건 세상이 아무도 이해를 못하기에, 왜? 다 미친놈이라 그러니까! 그거는... 연약해지고 용서해주고 섬겨주는게 어떻게 강한거에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게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만 그 지혜가 옳다 인정함을 받아요. 다른 이들에게는 미련하다 인정받는다구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스인들 히브리인들 전부에게 다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지혜가 옳다라고 안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 하느님의 도끼가 들어오면 "하느님 또 어떤게 짤려 나가야 되나요?" 그리고 그 하느님의 도끼질을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실력자가 되세요. 그때 여러분은 진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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