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절망은 없다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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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9-23 | 조회수384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
"너희 안에 새 마음을 넣어주고, 너희 가운데 새 얼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리라."(에제36,26)
오늘은 오상의 비오라 불리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이탈리아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사제로 평생 병고중에도 만81세까지 장수한 성인입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비오 신부를 가경자로, 1999년에는 복자로 선언하고, 이어 2002년 6월16일에 성인으로 시성합니다. 마지막 감동적인 임종 장면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968년 9월23일 이른 아침에 비오 신부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고 서약갱신을 하였다. 비록 더는 기도문을 암송할 기력이 없었지만,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비오 신부는 “예수, 마리아”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새벽 2시30분경 비오 신부는 “나는 두분의 어머니를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말한 두 어머니란 그의 생모와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새벽 2시 30분 비오 신부는 침상에 누운채 “성모님!”하고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선종하였다.’
마지막 임종어가 “성모님!” 이었으니 말그대로 기도의 사람, 성 비오 사제였으며 이 임종어 안에 성인의 전 생애가 압축되어 있음을 봅니다. 오상의 비오 대신 고통의 비오 성인으로 불려도 좋을 만큼 성인의 어록에도 유난히 눈에 띄는 말마디가 고통입니다. 성인에게는 고통이 일상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역경은 그대를 십자가 밑에 있게 하고 천국의 문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거기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그대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만 고통을 슬기롭게 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고통만이 한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자격을 줍니다. ‘나의 하느님, 보십시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준비해야 합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아픔은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흡사 고통 예찬처럼 들립니다. 그대로 평생 파스카의 삶에 충실했던 고통의 성인 비오 사제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보물이 바로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성화聖化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여정에 희망과 용기, 힘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삶은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여정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요약되는 진선미眞善美, 신망애信望愛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설명이 이런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복음 중간에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시며 참으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깊이 경청할 것을 촉구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문득 떠오른 두 말마디입니다.
“절망은 없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썼던 말마디입니다. 또 하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면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지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작은 소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 나무를 심은 사람, 한결같이, 끊임없이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일희일비, 경거망동하지 않고 한결같이 제 삶의 자리에 죽기까지 충실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주변을 잘 살펴보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성인들은 곳곳에서 빛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결코 주변 상황에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순탄대로 마냥 좋은 땅만의 삶일 수는 없고, 때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상황이나 환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은 지속적 고통의 삶, 간헐적 기쁨의 삶, 바로 이것이 현실입니다. 노년을 보면 거의 병마와의 싸움, 말그대로 고해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살아내는 것이 씨뿌리는 사람의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매사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과의 관계는 날로 깊어질 것이요 어디선가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신망애 삶의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배밭 둥글둥글 환하게 익어가는 배열매들처럼 우리 신망애의 열매도 잘 익어가고 있는 지요?
진인사대천명,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매순간 깨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바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듯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도 하느님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합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해설이 이런 진리를 입증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씨가 뿌려지는 토양이, 바로 내 마음 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내 마음 밭이 길바닥 같거나, 바위와 같거나, 가시덤불 같으면 도저히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다음과 같은 결과일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래서 좋은 땅의 마음밭은 만들기 위한 부단한 영성훈련을 통한 습관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말씀을 맛들이고 체화시키는 렉시오디비나 성독의 영적훈련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은 물론 한결같은 수행 덕목들의 훈련과 습관화가 우리 마음 밭을 옥토의 좋은 땅으로 바꿉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박토도 좋은 땅으로 바뀝니다.
영구불변의 좋은 땅도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방치하면 곧 잡초밭이 될 것입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은 마음 관리를 너무 소홀히 합니다. 보이는 몸 건강 관리, 얼굴 관리, 몸매 관리, 피부관리, 재물관리 등 외적 관리에 몰두할 뿐 보이지 않는 마음 관리에는 너무 소홀하니 생화가 아니라 향기없는 조화같습니다. 얼굴은 천사인데 마음은 괴물인 경우도 꽤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통한 내적 마음 관리, 영성 관리가 정말 필요한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세속주의 시대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좋은 땅 마련에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에, 성화聖化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이뤄주십니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 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6,14-16).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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