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5주일 가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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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09-24 | 조회수332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5주일 가해] 마태 20,1-16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배우려고 해외로 유학을 나가 공부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말도 안통하는 머나먼 타지에서 이방인의 신분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고된 일이지요. 그런데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가에 따라 공부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결과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학위’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학위가 목적이 되면 공부가 재미 없습니다. 그 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이 대체 언제 끝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하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공부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 자신을 소진하며 지쳐가지요. 그러다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중도 귀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번째는 ‘공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우입니다. 본인이 원해서 시작한 공부는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자신의 무지를 바로잡고 진리를 깨우치는 즐거움에 빠져 공부에 몰입하다보면, 어느 새 배움도 마음도 훌쩍 자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학위 취득이라는 결과물은 그에 따라오는 ‘덤’이지요.
오늘 복음은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는 밭 임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밭 임자는 하느님이고, 밭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또한 주인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일꾼들은 우리들이지요. 문제는 오늘 복음에서 ‘일’이라는 표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입니다. 보통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이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힘들고 고된 ‘노동’을 가리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하고 원하는 것들을 사기 위해 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은 노동이 아닌 ‘소명’의 성격이 강합니다. 즉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되는 일인 겁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불러 맡겨주신 그 소명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것들을 얻어 누릴 뿐 아니라,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내적 외적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그 준비를 잘 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첫째’가 될 것입니다. 반면 그 준비를 소홀히 한 사람은 그 나라에서조차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꼴찌’가 될 겁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소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 소명의 의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으로 응답하여 그분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그 소명을 맡기시는 목적은 우리 각자가 영원한 생명과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 받은 소명에 충실히 임하면, 그분께서 약속하신 정당한 보상,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지요. 그렇기에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나에게 ‘기쁜 소식’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지 않으셨다면 삶의 의미도, 목적도, 나아갈 방향도 알지 못한 채,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당신께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우리 각자가 그분께 부르심을 받는 그 ‘때’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는 모태신앙, 혹은 유아세례를 통해 일찍 하느님을 알게 되어 그분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낮 열 두시’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는 어느 정도 철이 들고 나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신앙을 갖게 된 경우를 가리킬 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후 다섯시’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황혼기에 뒤늦게 하느님을 알게 된 경우를 가리키겠지요. 중요한건 모두에게 ‘정당한 삯’ 즉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나를 하느님 나라로 불러주시는 그 소중한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 상관없이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니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그 공평한 사랑에 불만을 품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소명 자체에서 의미와 기쁨을 찾지 못하고 그저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하느님께 불평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세례도 늦게 받았는데, 나처럼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데, 나만큼 성실히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지도 않는데 왜 저들과 내가 똑같은 보상을 받아야 되느냐는 겁니다. 하느님이 약속을 어기신 것도 아니고 나를 의도적으로 차별하시는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과 시기심으로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일한 만큼, 능력 만큼 대우받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에 찌들어 그게 정의라고 착각한 탓입니다. 저들보다 더 고생한 내가 그만큼 더 대우받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역차별, 불공정을 당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옹졸한 마음 탓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은 힘겨운 ‘의무’가 아니라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고된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생하고 희생하는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품삯이 아니라, 각자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해 나가야 할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뒤늦게 하느님을 알아 겨우 그분의 이름 정도만 알고 돌아가신 분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한평생 하느님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분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애쓰신 분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가 같을 리 없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주님의 뜻과 가르침대로 살아보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노력한 이가 느끼는 신앙의 기쁨과 보람이, 성당 문 밖으로만 나가면 주님의 뜻과 상관 없는 모습으로 사는 이가 느끼는 그것과 같은 수준일 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쓸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내가 하느님과 더 깊은 친교를 맺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최대로 누리는 ‘첫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기꺼이, 기쁘게 수행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주는 육체적 편안함과 안락함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참 평화를 소중하게 여기며 산 보람을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누리는 겁니다. 반면 하느님 나라에서조차 참된 기쁨과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꼴찌’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마지못해, 억지로 수행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살았기에, 하느님이 나의 ‘전부’가 되는 천국이 불편하고 싫은 겁니다. 그러니 나중에 내 발로 천국행 티켓을 걷어차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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