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는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다. (루카8,19-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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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9-26 | 조회수24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3년 0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는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다. 복음(루카8,19-21)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 - 앞절에 지금까지 말씀을 믿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곧 (루카8,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 사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 맺으신 분은 예수님뿐이다. 곧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리(眞理)로 받아들여 그분 안에서 좋은 땅이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지혜(智慧)다. (1코린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하느님의 지혜, 진리의 말씀을 사람의 뜻, 말이 아닌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 진리로, 마음에 간직한 사람이 바르고 착한 마음, 좋은 땅이다.(1테살2,13참조) 그래서 말씀이 생명, 구원의 열매를 맺으심을 믿고 말씀에 의탁하여 사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십자가) 밖이 아닌 예수님(십자가) 안에 그분과 하나 된 한 가족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용서받아 생명을 얻어 이웃에게 생명을 전한다. (루카8,16)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등경(燈檠)은 교회, 등불은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빛으로(묵시21,23),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당신의 몸을 태워 내는 하느님의 영광의 빛이시다. 그 빛을 그릇, 침상, 곧 사람의 것(빛)으로 덮어 가리지 말라는 그 말씀을 사는 사람들이다. 자신(그릇)을 깨트리고 자신을 치장, 도금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 곧 이웃들에게 사람의 의, 빛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義)를 빛으로 선포하고 삶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말씀으로 빛(생명)을 얻어 빛을 전한다. 그들이 예수님 밖이 아닌 예수님 안에 그분과 하나 된 한 가족이다. 곧 주님의 어머니요 형제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다. *실행(實行, 킵-깨달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함)- 자신의 마음에 간직한 하느님의 빛(희망의 말씀)을 주는, 곧 이웃과 빌(생명)을 나누는 삶, 올바른 신앙을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것이 오늘 독서 에즈라 6장에 말하는 하느님의 집, 성전(聖殿)의 완성이라 묵상해 본다.(1코린6,19) * 인간의 한계성은 절망으로 이뤄지고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그것은 은총(恩寵)을 구하는 자리를 만드시는 참으로 은혜(恩惠)로운 하느님의 간섭(干涉)이다. 이것을 거치지 않고, 확인하지 않고는 감히 신앙을 논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언제나 십자가가 중심에 서고, 하느님 사랑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절망적인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곧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십자가(十字架)가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면 십자가를 휘두르게 됩니다. (자싱의 생각, 뜻대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신자(信者)는 착한 행실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신자됨은 도덕적 승리, 윤리적 합격보다도 들보를 깨닫는 회개(悔改)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질그릇(나)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그릇이 깨져, 그 안에 보물(그리스도)이 나타나 드러나는 것입니다.(2코린4,5-7참조) 우리가 신앙적으로 좋은 실천을 할 때는 그가 가진 신앙이 윤리적, 도덕적 경지를 만들되 노력하고 애써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깨져서 가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자라났다고 이야기하기보다, 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께서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만 가실 수 있고, 어떤 윤리, 도덕, 신앙의 경지든 그리스도께서만 가시고, 그 안에서 내가 그 자리를 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지는 어떤 성공적인 모습들은 그 자신을 부인(否認)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는 게 아니라 죽어 예수님 안에 묻혔노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들보’를 깨닫는 절망을 자신 안에서 확인하는 자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되고 그런 차원에서 자기를 죽여, 자존심과, 증오와 파멸을 종식(終熄)시켜, 빛이고 사랑이고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자기를 묻을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참다운 빛과 소금의 자리로 나가는 신앙의 큰 비밀, 신비(神秘)입니다. (로마5,10. 8,32)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 하느님께서 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게하신 그 사랑, 은총의 사건에 오늘도 매달립니다. 저의 죄악보다 하느님의 용서, 자비의 힘이 더 크심을 믿습니다. 이끌어 주세요~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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