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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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10-04 | 조회수25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 루카 9,57-62
“먼저“
우리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세포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이며 생장과 소멸을 계속 하지요. 하루에도 3300억개나 되는 세포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또 사라집니다. 1초에 380만개나 되는 세포가 새로운 세포로 교체되는 셈입니다. 또한 교체주기가 가장 느린 세포를 기준으로 하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포로 바뀌기까지 약 7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와 7년 후의 나는 적어도 세포라는 구성성분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늘 새로 태어남’입니다. 더구나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를 바란다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적당히 몇 가지만 대충 바꾼다고 해서 새로 태어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새로 태어나고 싶다면 죽는 시늉만 할 게 아니라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려놓는 척만 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은 주님을 따르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에 누리고 있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소유하고 간직한 만큼 미련이 되고 집착이 되어 계속해서 내 발목을 붙잡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의 모습이나 습관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내버려두고 방치하는 만큼 고집이 되고 생활이 되어 나를 그 자리에 눌러앉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내려놓는 용기와 단호하게 끊어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눈치를 보며 미적거릴게 아니라 즉시 실행에 옮겨야만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주님을 따르며 그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이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를 따라라’라는 말씀을 들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내뱉는 말은 “먼저”라는 조건입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먼저’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앞과 뒤에 오는 것들의 순서가 문제입니다. 즉 ‘주님을 따르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하겠다’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을 따르겠다’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혹자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 예언자가 그러했듯, 먼저 자기 신변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걱정거리를 없애면 홀가분하고 완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이지요.
하지만 각자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돌아봅시다. 누군가 내가 정말 좋아하고 고대하던 일을 하자고 권할 때, 한 번이라도 ‘이것 먼저 하고 나중에 천천히 하자’고 답한 적이 있던가요? 보통 우리가 당장 하기를 망설이며 나중으로 미루는 일들은 하기 싫거나 피하고 싶은 일 아니던가요? 그렇게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미루다가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될 적당한 핑계를 찾으면 ‘기회는 이 때다’하고 내팽겨치지 않던가요? 그리고 나중에가서야 ‘그 때 그냥 할걸’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지 않던가요? 그러니 ‘쇠뿔은 단김에 빼야’합니다.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가며 미루고 망설이다가는 절대 주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구원의 기회, 참된 행복의 기회는 우연히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노력과 결단으로 붙잡는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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