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7.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어야[3/4] / 상경기[3] / 공관복음[8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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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0-05 | 조회수26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7.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어야[3/4](루카 10,29-37) / 부스러기 복음[82] 그것은 ‘그들은 받고 내가 주는’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도 받고 나도 받는’ 외형적이고도 계산적으로만 보여주려는 사랑이 되기도 한다. 율법 학자는 이웃에 대한 이런 ‘가진 자’만이 가지려는 이 관행적으로 내려온 단순 논리로, 너는 ‘나만큼 알고 있는가?’ 라며 건방지게 도전하는 것이었다. 사실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관점에서 ‘누가 나의 이웃이냐?’ 라는 질문은 달리 말해,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느냐?’ 와 일맥상통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 학자의 물음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명쾌히 설명하셨다. 율법적으로 맞대응하면 또 다른 논쟁의 소지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런 소인배들과의 논쟁에만 매달릴 만큼 많은 시간을 가지시지 않으셨기에. 그렇게 그분께서는 우리 인류의 구원 사업을 위해 할 일이 너무나 많으셨다. 그래서 실제 상황을 들어 그 소인배인 율법 학자의 질문에 화답하셨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향하는 행인이 있었는데, 그는 산적을 만나 가진 것은 다 빼앗기고 초주검이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이 행인의 현재 상황은 어떤 처지인가? 누군가가 도와야 할 처지이다. 자, 누가 이 행인을 도왔는가? 예수님은 이 이야기에 세 사람을 등장시킨다. 이 세 사람 모두가 다 초주검이 된 행인의 주위를 지나간다. 사제와 세리,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제는 아마도 미사 집전하러 가다가 볼 수도 있었고,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서 돌아가고, 사마리아 사람은 일하러 가는 중일 수도 있었다. 다만, 세 사람의 직업은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나 신분 정도도 다 달랐다. 사제는 가다가 보고서는 피해서 달아났다. 분명히 초주검 상태인 사람이 쓰러져 있었는데도 멀리서 보고는 피해 달아났다. 왜 달아났을까? 사제는 쓰러져있는 이 행인의 꼬락서니가, 혹시 죽은 사람이 아닐까 하여 달아났는지도 모른다. 성스럽다고 여기는 미사 집전을 시신을 보고는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제다운 율법 논리를 가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차마 다가가서 그 시체를 직접 확인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리라. 이런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는 생각으로만 보고는 피하여서, 그의 갈 길을 재촉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극도의 도움이 필요한 행인을 가다가 먼 거리에서 보고는,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보고는 지레짐작하고 달아났다고 여겨진다. 미사 집전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제 갈 길을 재촉한, 사제 본연의 본분을 지킨 진정한 사제일 수도 있다.
한편, 세리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가다가 다가가서 보고는 피해서 달아났다. 가서 보고는 분명히 초주검인 걸 확인하고 달아났다. 왜 다가가서 보았을까? 그 시각에 재수 사납게 그 꼴사나운 것을 목격한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다가가 보았다라고 하면 혹시라도 후일을 위한 알리바이라도 건질 수 있는 막연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확인하고는, 이 정도면 자신의 지나침조차 모르는 초주검 그 자체라는 상태인 것을 확신하고 달아났던 게 아니었을까? 계산이 빠른 그에게는 그렇게 확인이 필요했고, 그리고는 안심하여도 될 것으로 믿어 달아났을 수도. 아무튼 세리는 행인의 그 어려움 처지를 안중에 두지 않고, 오라 가라 귀찮게 구는 나중의 난처함에 처할 것을 생각하여 다가가서 확인까지 하고는 피해 달아났던 것이다.
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하였을까? 그는 가다가 보고는 혹시나 하였지만, 즉시 지체 없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 행인의 초주검 상태에 대해 측은한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응급 치료를 하고는 자기 나귀에 싣고 가까운 여관으로 데리고 가 밤새도록 치료를 하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 갈 길이 바빠 여관 주인장한테 행인의 치료를 부탁하고는, 가진 돈 두 데나리온을 치료비에 보태어 쓰라고 주었다. 두 데나리온은 우리네 돈 가치로는 이틀분의 노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치료비가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부족한 것을 갚아 주겠다고 약속까지 하고는 길을 떠났다.[계속] [참조] : 이어서 ‘8. 우리는 누구의 이웃이어야[4/4](루카 10,29-37)’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과의 관계를 한번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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