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환대 영성의 원리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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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10-10 | 조회수48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회개, 경청, 환대-
오늘 강론 제목은 “환대의 영성-회개, 경청, 환대-”입니다. 정주서원을 하고 수도가정을 이뤄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환대영성은 핵심적 영성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치유, 환대의 평화,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으며 환대는 영성의 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 사랑을 닮은 환대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세상의 오아시스와 같은 정주 요셉 수도원의 환대의 영성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환대의 집으로,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좌우명 기도 한연도 환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이래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는 환대를 통한 선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환대는 베네딕도 규칙 53장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낼 것이며 특히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환대 영성의 놀라운 점은 손님들의 환대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맞아들이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환대하듯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환대의 반대는 냉대나 박대입니다. 환대의 치유와 반대로 냉대의 상처와 아픔은 참으로 오래 갈 것입니다. 저는 교회도 수도원도 섬김의 직무로서 학교나 병원, 음식점처럼 서비스업에 속한다 봅니다. 정말 서비스업에 속하는 분들이라면 친절하고 따뜻한 환대는 기본이어야 할 것입니다. 불친절하고 냉대하는 차거운 분위기의 서비스기관이라면 손님은 절대 다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환대하면 오래전 그러니까 23년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정말 신기한 얼굴입니다. 활짝 웃는 환대의 얼굴이 꽃같은 사람 얼굴이라면 화로 이그러진 얼굴은 때로 괴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의식적 의도적 미소나 웃음의 훈련과 습관도 필요함을 배웁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가 환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 참 편안하게 수시로 찾았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같습니다.
여러분도 피곤하고 지쳤을 때 언제든 이렇게 찾을 수 있는 그리운 환대의 집이나 환대의 사람이 있으신지요? 저에겐 언제나 여기 환대의 집인 성전과 환대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두 자매는 모두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여 환대한 환대의 사람들이었는데 환대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오늘 복음의 해석은 관상의 마리아와 활동의 마르타로 분류했는데 틀린 것은 아니나 본질적인 관점은 관상과 활동이 아닌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환대의 방식에서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르타처럼 제 좋을 대로의 음식준비의 환대가 아니라 손님인 예수님의 의중에 따른 환대를 한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분주하게 음식준비하다 화가난, 좀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두분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마르타의 내면이 참으로 시끄럽고 산만했음을 봅니다. 화와 짜증이 가득하고 내적평화가 없습니다. 참으로 내적회개와 내적평화의 회복이 화급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요나의 회개선포에 니느베 사람들의 거족적, 전격적, 전폭적 회개가 이뤄지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제 기후재앙과 온갖 전쟁을 야기한 전세계인들이 영적혁명과 같은 더불어의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박한 절체절명의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도 병도 많은 각자도생의 세상이요 흡사 공동의 집인 지구가 불타고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니느베 백성들과 같은 극적인, 드라마틱한 회개만 있는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회개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는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이며 바로 활동에 치우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관상기도와 회개였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정확하며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부드럽고 따뜻한 호칭에 주님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선적인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라는 마르타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말 잘 경청해야 맹목적인 활동으로 일에 중독되지 않고 깨어 올바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의 방향을, 일의 완급을, 일의 우선 순위를 분별하고 절제할 수 있는 힘은 관상과 경청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환대 영성의 원리가 자명히 드러나니, 회개-경청-환대의 구조입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가 이런 구조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미사시 참회 고백기도 자비송으로 시작하여 말씀 전례에서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이어 성찬 전례에서 성체의 주님을 모시는 환대로 참된 환대 영성의 실현입니다. 회개와 경청, 환대의 정신으로 시편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은 그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수행하는 공동전례기도는 주님을 환대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 훈련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공동 전례를 통한 주님의 환대는 일상에서의 형제들 환대에로 그대로 전환되어 주님을 환대하듯 형제를 환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우리는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참된 치유와 구원의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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