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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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10-17 | 조회수577 | 추천수5 | 반대(0) |
정민 베르나르도 교수님의 ‘다산과 연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산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격물치지는 흐트러진 것을 바르게 하면서 앎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다산의 글은 그래서 늘 정갈하고, 정확했습니다. 다산의 대표작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관리가 행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제시하였습니다. 관리는 목민심서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습니다. 다산은 완벽함을 추구했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은 창의적으로 먼가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다산과 같은 본당 신부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 문학, 음악, 건축, 언어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여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제게도 ‘팡세, 그리스 철학사, 예수’와 같은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산보도 늘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기에 좋았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연암은 ‘갈 길과 요령’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다산이 조선이라는 ‘틀’에서 격물치지를 했다면 연암은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의 ‘틀’에서 갈 길과 요령을 생각했습니다. 조선이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정책을 세운다면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암은 만주 벌판을 거닐면서 드디어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듯이, 연암은 끝없이 이어지는 만주벌판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번 ‘울음’을 터트려도 좋겠다는 포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연암의 ‘열하일기, 호질, 허생전, 양반전’은 다산의 격물치지는 아니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판단한 자신의 생각을 요령껏 기록한 것입니다. 연암이 다산처럼 기록했다면 당시 조선의 법정에서 유죄판단을 받을 수 있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연암은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연암에게는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창조적인 문하생들이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에 다산의 ‘격물치지’와 연암의 ‘갈 길과 요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환상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산의 격물치지를 따르기도 어렵고, 연암의 창조적인 갈 길과 요령을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저 자신 매일 ‘묵상’을 나누지만 ‘갈 길’을 모르면 시간이 흘러도 글을 쓰기 힘들었습니다. 흐트러진 마음에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려 할 뿐입니다. 오늘 교회는 ‘복음사가’ 루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두 개의 성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루카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루카 복음이 우리에게 ‘갈 길과 요령’을 알려 준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격물치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루카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글을 썼기에 ‘갈 길과 요령 그리고 격물치지’가 조화를 이룬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에게 ‘갈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요령’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격물치지’는 겸손과 인내로 ‘칠죄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루가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만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루가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도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루가복음 23장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구원은 어느 곳을 향한 여정과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순례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 모든 만남이 지향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끝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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