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9주일 가해, 전교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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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10-22 | 조회수266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연중 제29주일 가해, 전교주일] 마태 28,16-20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지금까지 40년이 조금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진지한 제안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중에 ‘가톨릭’ 신자는 한 분도 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 혹은 우리가 소위 ‘사이비 종교’라 부르는 이단 종파를 믿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심지어 제가 로만카라를 한 상태에서 가톨릭 사제였음을 밝혔음에도 굽히지 않고 본인의 신앙을 전파하려고 하셨지요.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누군가에게 말 걸기조차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망설임 없이 다가가 담대하게 자기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고 자기와 함께 믿어보자고 손을 내미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서 올까요? 크게 두 가지일 겁니다. 자기들이 먼저 믿어보니 정말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이고, 많은 이들에게 전교하여 실적을 쌓아야 자신이 천국에서 더 좋은 삶을 누린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기에 최선을 다하는 걸겁니다. 그들에 비해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내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습니까? 나는 ‘하느님 나라’를 굳게 희망하며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 속에 살고 있습니까?
가톨릭 교회에서 ‘전교주일’을 지내는 것은 지금 내가 주님 사랑에 대한 분명한 확신 속에서 기쁘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지금 내가 ‘하느님 나라’를 굳게 믿고 희망하며 그 힘으로 주님 뜻을 충실히 따르며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이 때 성찰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전교’, 즉 내가 말과 행동으로 내가 믿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가 이 땅에서 온전히 실현된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잘 모르는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의 길’을 걷고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앞다투어 몰려드는, 생각만 해도 흐뭇한 광경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이 가능한 것은 누군가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과 뜻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교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더 이상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칼을 휘둘러 다치게 하는 일도, 자기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일도 없는 참된 평화의 세상이 실현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시고 선포하신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분 제자인 우리는 그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초대해야 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면 모두가 ‘주님의 빛 속을 거닐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온갖 좋은 것들을 맘껏 누릴 수 있게 될 겁니다.
이처럼 전교가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하고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건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교리에 대한 지식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해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도 다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전교라는 어렵고도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겠느냐며 손사래를 치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은 제자들도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타고난 조건이나 능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귀로 직접 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모습까지 보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의심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디스타조’는 ‘마음이 갈라지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뜻 안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겁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온전히 믿지 못해 흔들리고 망설이는 제자들을 꾸짖지도, 그들의 모습을 억지로 바꿔놓으려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도’라는 소명에로 부르시지요. 예수님께는 그들의 능력도, 지식도, 조건도, 심지어 믿음의 깊이도 중요치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의지와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닌 부족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중요한 소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니 ‘저는 부족해서 안돼요’라는 핑계는 주님 앞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부족한걸 다 알고 부르셨으니, 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을 하도록 허락하셨으니, 그분 명령에 따라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분의 제자가 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교리지식을 설명함으로써가 아니라, 내가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직접 몸으로 부딪히셨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위고하를 구분하지 않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자를 차별하지 않고 두루 만나셨습니다. 다만 힘 없고 가난한 이, 질병의 고통에 신음하는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여 외롭고 힘든 이에게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고,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솔선수범 하셨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정작 실천은 하지 않았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당신이 먼저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이 먼저 제자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당신이 먼저 고통의 잔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으며, 당신이 먼저 배신자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고, 당신이 먼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랬기에 겸손하라는, 십자가를 지라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친구를 위한 사랑으로 목숨까지 내어주라는 그분 가르침이 우리 마음에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무슨 일이든 혼자 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당신 능력만으로 충분하다고, 사공이 많아봐야 배가 산으로 갈 뿐 당신 일을 하는데에 귀찮고 방해만 될 뿐이라고 당신 혼자 다 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잘못하면 바로잡을 때까지, 부족하면 채울 때까지, 느리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셨고 참아주셨고 함께 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 그분 덕분에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가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늘 기도하셨습니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무실 시간을 줄여가면서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기가 고통스러워도 피눈물을 흘려가면서까지 기도하시고 순명하셨습니다. 청하고 구하는 기도보다 감사하고 찬미하는 기도를 먼저 하셨습니다. 그런 기도의 힘으로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으실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에는 화려한 언변이나 대단한 능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4가지 모범을 묵묵히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천주교 신자라서 그런지 확실히 달라’라는 말을 듣는게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전교인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교는 ‘주님과의 동행’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동행이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 겁니다. 그분 사랑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더 분명하고 크게 만들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점점 더 가까워질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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