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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0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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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0-29 조회수232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30주일 가해] 마태 22,34-40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인간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은 어떻게 다를까요? 인간은 보통 자기 마음에 드는 이를 사랑합니다. 외모, 재력, 학력, 권력, 인기 등등의 조건이 출중한 사람,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요. 그래서일까요?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찾으러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오가는 질문들은 온통 조건에 관한 것들 뿐입니다.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브랜드 몇 평의 아파트에 사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뭐하는 집안인지 등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정작 그의 사람 됨됨이가 어떠한지, 그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이고 가장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호불호를 따지기 시작하면, 여러 선택지를 두고 저울질을 하게 되면 그건 이미 더 이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우리에 비해 하느님은 마음이 가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서 더 마음을 쓰시는 이들은 보통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작고 약한 이’들이지요. 그들에게 더 마음을 쓰시는 이유는 그들이 ‘아픈 손가락’이기 때문입니다. 열 손가락을 이빨로 깨물면 다 아픕니다. 그런데 그 중 상처입고 약한 손가락은 상대적으로 더 아픕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부모로서, 그 아픔을 누구보다 더 잘 헤아리시고 깊이 공감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고통과 시련 앞에 더 괴로워하는 아픈 손가락들을 더 따뜻하게 보살피시는 겁니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첫째,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무시와 차별 그리고 배척까지 당하는 그들의 딱한 처지를 안쓰럽게 여기시는 것이지요. 둘째, 과부와 고아를 억누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족 중심 사회인 이스라엘에서 그들은 위험에서 보호해줄 울타리도,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언덕도 없는 참으로 가련한 이들이지요. 하느님께서 그런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며 당신이 직접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나서시는 겁니다. 셋째, 가난한 이들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은 열어주라고 하십니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겉옷’ 한 벌 뿐인 이가 돈을 갚지 않았다고 그 겉옷을 빼앗으면 그는 영하의 기온으로 떨어지는 사막의 밤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죽고 말테니, 정말 부득이하게 그의 생명줄인 겉옷을 담보로 잡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밤시간에는 그가 그옷을 입고 있을 수 있게 아량을 베풀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하느님의 권고를 무시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우리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이 내뱉는 고통의 탄식 소리가 하느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그분께서직접 우리에게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왜 내가 넘치도록 충만하게 베풀어준 은총과 사랑을 이웃 형제들과 나누지 않고 너 혼자만 독식했느냐’고 말이지요.


우리가 이처럼 탐욕의 노예가 되어 멸망하지 않으려면, 하느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그분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철저히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먼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던지, 주일 미사를 빠지지 않고 참례한다던지, 교회가 정한 신자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다던지 하는 방법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그 정도 방법으로는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했다고 하기에 한참 부족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느님께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고, 미사 참례나 신자로서의 의무 이행은 내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여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니 엄밀히 따지면 하느님께 도움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함을 하느님께서 분명하게 느끼실까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와 ‘회개’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자식들이 자신의 사랑을 알아봐줄 때이지요. 그런 점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음을 깨닫고 그분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그분께서는 참으로 뿌듯해하시고 기뻐하실 겁니다. 또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당신께 돌아가는 ‘회개’를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시고 반기실 겁니다.


그런데 그저 말만 앞세우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은 하지 않는다면, 그런 감사와 회개는 하느님께 채 전달되기도 전에 공허한 메아리로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리고 말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이라는 ‘관념’을 이웃사랑이라는 ‘실천’에 연결시키십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는 속담처럼,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아끼고 사랑하시는 이들을 나 또한 사랑하는게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인 인간을 당신 외아들을 기꺼이 내어주실 정도로 극진히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 우리가 다다를 수 있는 사랑의 최고 경지는 어느 수준일까요? 바로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 우리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경향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 경향성을 거슬러 나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대할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끄는 구원의 수레에 달린 두 바퀴입니다. 둘 중 어느 한쪽이 빠지면 구원이라는 목적지에 무사히 다다를 수 없지요. 둘 중 하나도 제대로 실천하기 버거운데 둘 다 실천해야 한다고 하니 마음이 부담스럽고 힘드시겠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각각의 바퀴가 아니라, 두 바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축인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연민하고 존중하는 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고 누군가를 위해 자선을 베푸는데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줄 아는 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기는 참 어렵습니다. 또한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이가 타인을 무시하거나 증오하고, 억압하며 착취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려운 교리나 신학을 잘 몰라도,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진 ‘사랑’이라는 본성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직하고 성실하게 그 본성을 따라가며 선하신 하느님을 닮아갑시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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