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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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11-03 | 조회수496 | 추천수4 | 반대(0) |
지난 휴가 때에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들과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만나면 비슷한 질문을 받곤 합니다. ‘언제 한국에 다시 오느냐?’라는 질문입니다. 태어나서 55년을 살았으니 한국에 제게는 조국이고, 모든 것이 익숙한 땅입니다. 가족들이 있고, 함께 사제서품을 받은 동창 신부들이 있고, 언어가 통하고, 모든 것이 편한 곳입니다. 동창 신부님의 사제관에 며칠 머물면서 그 익숙함이 편안함으로 다가왔습니다. 깨끗하고, 정갈하고, 대접받는 느낌입니다. 뉴욕에서 5년 째 살면서 들에 핀 꽃 같다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안전하고,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들에 핀 꽃은 비와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가뭄에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매주 신문을 만들면서 보람이 있지만 늘 긴장이 함께 합니다. 구독자의 감소로 신문사 운영에 대한 부담도 어깨에 짊어져야 합니다. 청소, 세탁, 식사도 혼자 해야 합니다. 뉴욕에서의 삶에서는 들에 핀 꽃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와 충만함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라는 삶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성서의 땅,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땅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천년 동안 나라 없이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전에 다시금 정착한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던 땅입니다. 신앙인들은 그 땅을 ‘성지(聖地)’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신념과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평화와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삶의 지침과 이정표로 여기는 ‘쿠란과 토라’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방인을 따뜻하게 돌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화 땅에서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땅’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라는 ‘삶’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입니다. ‘왜’라는 원인을 찾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배려와 포용을 선택한다면 그곳은 평화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참된 평화와 자유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찬된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심수봉 씨가 불렀던 ‘젊은 태양’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햇빛 쏟는 거리에선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종소리 바람소리 고이고이 잠들던 날/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모진 바람 거센 파도 가슴속에 몰아쳐도/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라는 가사가 마음에 남습니다. 수천 년을 그 땅에서 살아왔던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도 결국은 모두 이방인인 것을 왜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18년 전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저는 빅터라는 분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였습니다.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지내다보니 시간이 늦어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빅터에게 양해를 구하고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빅터는 낯선 손님 때문에 당황을 했고, 저에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존중하니, 당신도 나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부부도 그렇게 하지 못해서 서로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우리사회에도 그와 같은 존중과 배려가 없기 때문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유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달인 10월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11월에게 자리를 내 줍니다. 아름다운 색으로 멋을 내던 나뭇잎도 바람이 불면 떨어져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 시작은 겸손입니다. 겸손의 다른 이름은 존중과 배려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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