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28. 혼인 잔치의 비유 / 상경기[3] / 공관복음[1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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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1-07 | 조회수16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8. 혼인 잔치의 비유(마태 22,1-10; 루카 14,15-24) / 부스러기 복음[103] 성경에서 혼인은 가끔 하느님과 유다인의 기쁜 만남의 상징으로 부름에 응하는 표징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혼인을 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초대받은 자들의 불응이다. 성경에 혼인 잔치의 비유가 두 가지 나오는데, 두 가지가 상이하지만 쟁점은 단 한 가지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유다인이든 다른 민족이든 가난한 이들로 이루어지는 당신의 새로운 백성을 부르실 것이라는 예고다. 그분 부름에 응하지 않는 유다인과 부름에 응하는 이민족의 종말에서 맞이할 처지를 살펴보는 것도 뜻있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두 비유를 나누어 묵상한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있던 어떤 이가 그분께,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이는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이가 큰 잔치를 베풀려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이는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이는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다시 일렀다. ‘그러면 어서 고을의 한길로 가서, 가난한 이,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다 데려오너라.’ 얼마 뒤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사례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르셨다. “하늘 나라는 아들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 잔치에 초대된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지만, 그들은 오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종들을 보내며 단단히 일렀다. ‘그들에게, ′이미 잔칫상을 푸짐하게 차렸소. 이렇게 준비를 다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임금이 보낸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그러자 이에 진노한 임금은 그들의 고을을 샅샅이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어귀로 가 만나는 대로 불러 오너라.’” “그래서 종들은 악한 이 선한 이 할 것 없이 다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붐볐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 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이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길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답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종들에게 일렀다. ‘이자를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이 두 번째 비유는 맨 먼저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이제 구원에서 제외되는 많은 유다인을 암시하는 말일 수 있다. 그리고 ’혼인 예복‘은 어쩌면 의로움 곧 믿는 이의 평소에 베푼 선행이나 자선과 관련된 표징일 게다. 사실 하느님의 초대는 공평하게 무료다. 그래서 초대받은 이는 자기 나름으로 그 무언가를 해야만 한단다. 이처럼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선인, 악인 할 것 없이 다 하느님의 은혜로 초대받아 뒤섞여 있지만, 결국 그들 각자가 살아온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양편으로 갈린다나. 과연 우리는 어떤 편에다 설 것인지, 그 결과는 삶의 터전에서 각자가 지낸 마지막 결산으로 정해질 것이다. 그렇다. 비록 하느님의 은혜로 많은 이가 부르심을 받지만, 선택될 이들은 적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부르심 받은 이들이다. 그 유종의 미는 다 각자의 ’몫‘이다.[계속] [참조] 이어서 ‘29. 버림과 따름(마태 10,37-38; 루카 14,25-27)’이 소개될 예정입니다. 버림과 따름은 예수님 시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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