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31. 잃어버린 양과 은전 / 상경기[3] / 공관복음[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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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1-10 | 조회수19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1. 잃어버린 양과 은전(마태 18,12-14; 루카 15,1-10) / 부스러기 복음[106] 앞으로 전개될 세 가지 비유, 잃어버렸던 양과 은전과 아들에 대한 내용은 그 점진성이 분명하다. 곧 양 백 마리 가운데 하나, 은전 열 개 가운데 하나, 아들 둘 가운데 하나로 점점 그 수가 작아진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고 분개하는 ‘의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잃었던 자녀들을 되찾으실 때에 느끼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이야기하시면서, 특히 바리사이들에게 이 기쁨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신다. 매우 비슷하게 전개되는 처음의 두 비유인 잃어버린 양과 은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찾으심을 드러내고, 셋째 비유인 되찾은 작은 아들 내용은 자비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되돌아오는 죄인을 기꺼이 맞이하심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사실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은 통상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관계를 말하는 데에 이용되는 아주 고전적 주제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들을 되찾음은 구원을 뜻하는 전통적 은유이다. 이 ‘되찾은 양’의 비유는 공동체의 ‘작은 이’들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의 적용과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찾으심을 강조한다. 아마도 후자가 이 비유의 원 의미에 더 가까울 수도. 먼저 되찾은 세 가지의 비유 도입부이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이전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불평을 수차 들은 바가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중 어떤 이가 양 백 마리를 가졌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둔 채, 그 잃은 양 찾을 때까지 뒤쫓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그 양을 찾으면 기뻐서 메고 집으로 가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은 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는 회개한 그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는 진정한 ‘의인’을 생각하는 것으로, 죄인의 회개가 가져오는 하느님의 기쁨, 그리고 그 죄인의 회개에 대한 그분의 관심을 강조하는 하는 것일 게다. 예수님께서는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들으라면서 이 비유를 드시는 것이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에 대한 그분의 비판은, 여기에서 오히려 거짓된 의인들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들은 바로 자기들이 회개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이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길 잃으면, 아흔아홉을 남겨둔 채 길 잃은 그 양 찾지 않느냐? 그가 그 양 찾으면,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그냥 둔 아흔아홉보다 그 한 마리에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위선에 찬 이들에게 이르신다. “또 어떤 부인이 가진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으면, 등불 켜고 찾을 때까지 집 안을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그러다가 찾으면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합시다. 잃었던 이 은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사실 이 그리스 은전 한 닢은 로마의 한 데나리온과 값어치가 거의 같다. 은전 열 닢 가진 이 부인에게 한 닢 잃어버리는 것은 큰 손실이다. 지금의 십일 분 일당에서 하루치를 잃었기에, 그 부인은 기를 쓰고 그 은전 찾으려할 게다. 그러다 찾은 그 기쁨은 상상만 하여도, 비길 데가 없을 만큼 크리라. 이 두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줄곧 회개를 강조하신다. 이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기에, 참으로 의로운 인간은 없다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이들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어쩌면 이 잃어버린 이들이 교회 공동체에서 멸시를 받거나, 또는 엄격한 규정 등으로 공동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 길 잃을 위험이 있는 ‘떠난 이’이기도 할 게다. 당시의 유다 사회처럼 지금의 우리네 교회에서도 길 잃고 위험에 처한 떠난 이가 도처에 있다는 게, 메시아 시대의 교리적인 상황과 별반 다를 바가? 아무튼 떠난 이, 잃어버린 이나 교회 공동체의 회개는 결국 하느님의 기쁨이다. 이처럼 행복을 안겨주는 신앙의 신비는 다 회개의 몫이다.[계속] [참조] 이어서 ‘32.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이 비유는 두 부분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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