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최후의 심판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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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11-11 | 조회수28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경건하고 모없이 슬기로워서 겸손으로 티없이 보낸생애여 주께받은 생명을 꽃피웠으니 그향기를 만세에 남기었도다."
마르티노 성인을 기리는 아름다운 찬미가 한연입니다. 오늘 11월11일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정말 다양한 가톨릭 성인들의 축일입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없듯이 똑같은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꽃마다 크기와 모양, 색깔과 향기가 다 다르듯이 성인들도 그러합니다. 어제는 위대한 대 레오 교황의 축일이었고 오늘은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축일입니다. 교회는 기념일로 지내지만 수도 주교 성인이었던 성 마르티노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과는 각별한 인연이기에 축일로 지냅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지닌 마르티노 성인이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이전 처음으로 서방에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수도 성인으로 프랑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대레오 교황이 61세를 사신 반면 마르티노 성인은 81세로 그 당시로는 장수를 누린 성인이기도 합니다. 성인 축일을 지낼 때 마다 반드시 생몰生歿연대를 확인하며 제 나이와 비교해 보곤 합니다. 새삼 죽음과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도 머지 않았음을 봅니다.
마르티노 주교 성인의 인생 여정도 참 각별합니다. 고대 동방 수도생활에는 사막교부 “안토니오의 생애”란 책이 있듯이 경쟁하듯 서방에는 “마르티노의 생애”란 책이 있고 여기 소개된 성인에 대한 무수한 기적과 일화들입니다. 성인은 316년 헝가리 판노비아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제국의 장교였던 아버지의 임지인 이탈리아 북부의 파비아에서 소년 시절을 지냈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의 투르의 주교후 물러나 수도생활에 전념하다 선종하신 분입니다. 오늘날 중국이 하나이듯이 당시 유럽은 한 나라의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성인은 가톨릭 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니면서 성인이 된 최초의 분이었고,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이기도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수가 없습니다.” 전장에서 싸움을 거부한 성인은 투옥되었다 풀려나 수도여정의 길에 오르게 됩니다. 성인의 그리스도교의 개종에는 유명한 전설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군복무중 자기가 지닌 것은 외투와 칼뿐이었던 성인은 낮에 추위에 떨고 있던 걸인에게 지체없이 칼로 외투의 절반을 잘라 입혀 주었고, 바로 그날 밤 꿈에 자기 반쪽 외투를 걸친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옷을 입혀준 걸인이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옷을 입혀주었다.”
그날 밤, 주위의 천사들에게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꿈속에 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잘라졌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목격했다는 일화입니다. 이런 일화가 그의 수도성소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18세에 세례를 받게 되고 군문을 떠나게 됩니다.
성인은 수도 주교가 된 이후로도 불굴의 열정으로 수도생활과 더불어 열렬한 사목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미 생존시 많은 기적이 있었다 합니다. 성인의 죽음도 순전히 과로로 인한 병사입니다. 주님의 병사(兵士)로서 병사(病死)한 것입니다. 그의 선종시 전해지는 기도에 관한 일화입니다.
“주님, 아직 당신 백성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계속 일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지소서.” 기도후 만류하는 신자들에게 “그냥 두시오. 땅보다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습니다. 이제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에 이 내 영혼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남기고 397년 1월8일 선종하셨다는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걸인에게 그의 외투를 잘라 나눴다는 전설같은 일화요 여기 근거한 오늘 복음 말씀의 선정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수님께 관한 예언이면서 파견받은 우리 신자들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셨다.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입혀주게 하셨다.”
고해인생을 기쁨과 자유의 축제인생으로 바꿔주라 파견되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 하느님의 영을 우리 위에 내려 주시고, 당신 복음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최후의 심판을 서술하는 참 엄중한 서술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하느님을 대신한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며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다음 여섯의 자비행입니다. 한 번 자신을 넣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죽어서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된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에게 선언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이어 구체적 사례를 열거하십니다. 모두가 추상적 사랑이 아닌 몸과 관련된 구체적 자비행을 지칭합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외투에 관한 일화는 4항에 해당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2.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3.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고, 4.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5.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6.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오른쪽에 구원받은 이들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해드렸느냐 묻고 이에 대한 답이 오늘 복음의 결론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울림을 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종파의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인류중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주님입니다. 온 인류가 예외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거룩한 전례도, 기도도, 온갖 수행이 심판의 잣대가 아니라 주변에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을 살피고 돕는 자비행이 심판의 잣대라 합니다. 새삼 정신 번쩍 들게 하며 우리 자신의 이웃에 대한 무관심과 나태를 부끄럽게 합니다. 참으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에 충실한 사람이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도 이런 자비행의 실천에 소홀함이 없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의인들은 빨마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체드루스처럼 자라나리니 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시편92,13-14).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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