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 32 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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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11-11 | 조회수556 | 추천수4 | 반대(0) |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수를 알라.’는 뜻입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은 후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많은 능력으로 업적을 쌓은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은 ‘여호수아’의 몫임을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광야에서 길을 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기꺼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지만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첫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주는 자양분입니다.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기꺼이 낮은 곳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납니다. 다투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습니다. 그 유연성이 만물에 덕이 된다고 합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 시작은 ‘카인’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과 멀어진 이유는 ‘분노’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셨지만,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카인인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카인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느님께 더 합당한 제물을 준비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고 다른 길로 갔을 때입니다. 분노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병중에 ‘화병(火病)’이 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화풀이를 잘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예도 많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애꿎은 그릇을 깨는 일도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대부분 ‘화’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두 번째 길은 ‘용서’입니다. 묶인 것을 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회개와 자비가 만날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겸손과 용서’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바라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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