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32. 되찾은 아들의 비유 / 상경기[3] / 공관복음[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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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1-13 | 조회수17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2.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 부스러기 복음[107] 이 비유는 두 부분이다. ‘아버지’라는 동일한 중심인물과 그의 자비로운 자세, 그리고 자기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동일한 그의 결론적 권고로 밀접하게 이어진다. 첫 부분서 문제에 대답을 내놓으면서, 마무리를 짓는 둘째에서 본질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당신께 오는 죄인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그 넓은 마음을 닮으라는 권고이다.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 사랑’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시는 예수님 말씀이다. 어떤 이에게 아들 둘이 있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중에 제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 작은애는 자기 것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재산을 다 허비하였다. 모든 걸 탕진하였을 즈음 그곳에 심한 기근으로, 그가 곤궁에 허덕거렸다. 그래서 그곳 주민을 찾아가 매달렸다.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 채우려 하였지만, 아무도 생활력이 나쁜 그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돼지는 유다인이 먹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접촉해서도 안 되는 부정한 짐승이다. 그래서 돼지를 친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음을 뜻한다. 또 ‘꼬투리’는 지중해변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자라는, 영어로 carob이라고 하는 나무의 꼬투리다. 9미터까지 자라는 이 나무는 길이가 15-25, 너비가 2.5-3.7센티미터 되는데, 즙이 풍부해 가축에게 좋은 사료로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도 쓰인다. 그제야 제정신 든 그는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둘째의 감정을 미화하지 않으신다. 지금 둘때는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참회가 아니라 배고픔이 큰 이유다. 또한 이는 둘째의 회개가 아닌, 아버지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게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그러니 아버지께 가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습니다. 저를 집의 품팔이꾼으로 써주십시오.′” 이렇게 마음먹은 그는 아버지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 맞추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서둘러 갔다는 것은 근동에서는 예외적으로 아버지 사랑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식에게 입맞춤은 아들을 용서함을 뜻한다. 아들이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지었습니다. 저는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둘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반지는 권위의 표징이고 신발은 노예와 반대되는 자유인임을 뜻한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다가 집에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을 불러 무슨 일이 있었나하고 묻자, 하인이 말하였다. “아우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아우님이 몸성히 오셨다고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화를 내며 대답하였다.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이나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거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하자.” 아버지는 큰애가 동생을 멸시하며 ‘저 아들’이라고 일컬은 것을, ‘너의 아우’라고 하며 바로잡는다. 되돌아온 아들은 앞으로도 계속 큰아들의 ‘아우’인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지만, 예수님 대답은 둘째를 되찾은 기쁨으로 차 있다.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비록 큰 애가 둘째를 끝내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이 시각 죄 많은 우리의 ‘회개’를 끝내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우리 모두 기쁘게 해 드리자. [계속] [참조] 이어서 ‘33. 약은 집사의 비유(마태 6,24; 루카 16,1-13)’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과 은전, 그리고 아들의 비유를 드시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따지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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