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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33주일 가해] 마태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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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1-19 조회수251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33주일 가해] 마태 25,14-30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명희 시인이 쓴 가사에 최덕신 씨가 곡을 붙인 <나>라는 제목의 생활성가입니다. 불의의 의료사고를 당해 태어나자마자 뇌성마비가 된 송명희씨는 하느님께 바친 이 찬양시를 통해 자기는 남들이 당연하다는듯 누리고 있는 것들중 대부분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하느님을 향해 열린 마음, 그분 말씀과 뜻을 귀기울여 듣는 마음을 받았기에, 세상의 것들을 풍족하게 누리며 부족함 없이 사는 이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생생하게 느끼고, 세속의 가치규범에 얽매여 사는 이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며, 그런 하느님이야말로 참으로 ‘공평하시다’고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누리는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남들보다 더 갖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며 불평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수많은 이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성숙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알맞은 탈렌트를 주십니다. 각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만큼 주십니다. 부족하지 않도록 충분히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더 달라고, 남이 가지고 있는 저것을 왜 나에게는 안주시느냐고 하느님을 닥달하며 따집니다. 이미 받은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데도, 굳이 다른 이와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누가 더 받고 누가 덜 받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능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그분 뜻에 따라 어떻게 잘 사용하는가가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탈렌트’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돈은 쌓아두고 감춰두라고 만든게 아니라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좋은 것들을 서로 나누라고 만들어졌듯, 탈렌트는 쟁여두고 으스대라고 주신게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사용하라고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채롭고 풍성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둘째, 탈렌트는 이미 다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큰 가능성을 품은 씨앗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내 노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탈렌트를 통해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크기도 커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탈렌트를 주셨는지를 제대로 식별하고, 그것을 왜 주셨는지 그분 마음과 뜻을 깊이 헤아려, 그분 뜻에 부합되도록 최선을 다해 잘 쓰면 될 일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나오는 첫째 종과 둘째 종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자신에게 수십 억에 달하는 그 큰 돈을 왜 맡겼는지를 제대로 헤아립니다. 그저 안전하게 묵혀두기를 바랐다면 대금업자들에게 맡겼겠지요. 그러지 않고 종들에게 맡긴 것은 그만큼 그들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재산이 어둡고 캄캄한 금고 안에 처박혀 그 가치와 빛을 잃는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운용하는 과정에서 그 액수가 줄어들더라도, 사람들 사이를 두루돌아다니며 유익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본연의 역할을 다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탈렌트가 지닌 참된 가치를 온전히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종은 주인의 그런 마음을 헤아려 탈렌트를 잘 ‘활용’하는데에 집중합니다. 여력을 남겨둔 채 적당히 하지 않고 전력으로, 설렁설렁 대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자기가 받은 탈렌트를 사용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흘린 땀은 그들을 배신하지 않고 풍성한 결실로 돌아옵니다. 참으로 뿌듯한 모습입니다.

 

주인은 그 두 종을 칭찬합니다. 많은 수익을 내서, 자기 재산을 불려서 칭찬한게 아닙니다. 자기가 맡긴 탈렌트를 자기 뜻에 맞게 잘 ‘활용’했기에 그 노력을 칭찬한 겁니다. 탈렌트를 맡긴 자기 뜻을 소중히 여기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그 ‘성실함’을 칭찬한 겁니다. 그래서 얼마를 벌었는지 그 액수에 따라 차등을 두지 않고 두 종을 똑같이 칭찬하지요. 탈렌트를 잘 사용해주리라 믿고 맡긴 주인의 신뢰에 순명과 노력으로 응답한 그들의 태도가 주인의 마음을 기쁘고 흡족하게 만드는 ‘착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윤리 도덕적으로 그 어떤 흠결도 없이 완벽한 인간이 되기보다, 당신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며 따르는 착실한 자녀가 되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참으로 하느님 자녀가 될 때, 그분께서 누리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게 되지요.

 

하지만 셋째 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베푸는 은총을 ‘숫자’로 가늠하는데에 익숙했던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탈렌트를 가장 적게 준 것이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여겨 억울해하고 서운해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인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맡긴 그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버립니다. 주인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자기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핑계를 대지만, 자신을 차별하는 주인이 미워서,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익이 되는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옹졸한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요. 그래놓고는 ‘왜 그랬느냐’는 물음에, ‘주인이 심지 않은데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에서 모으는 사람이라 그랬다’며 비난과 원망의 화살을 그에게 돌립니다. 자기가 ‘한 탈렌트’라는 큰 은혜를 받았음에 감사할 줄 모르고 주인이 해주는 것도 없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투덜거리는 그 모습은,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은총과 복은 주시지 않으면서 계명을 실천하라는 요구만 하신다’고 투덜거리는 우리의 옹졸함과 닮아있습니다. 또한 한 탈렌트를 땅에 묻은 채 묵혀두는 모습은 신앙생활이 주는 참된 기쁨을 누려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신앙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죄만 안 지으면 된다’는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는 우리의 나태함과 닮아 있습니다.

 

주인은 그런 셋째 종을 ‘악하다’고 선언하는데, 여기서 하느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악’의 정체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즉 우리가 조심하며 피해야 할 ‘악’은 법적 도덕적 윤리적 규범을 어기는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 갖고자 하는 욕심으로 내가 참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며 은총과 복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선한 의도를 왜곡하고, 나태함과 게으름에 빠져 그분 뜻을 실천하는 데에 소홀히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우리의 완고함과 뻔뻔함이야말로 그분 마음을 가장 아프게 만드는 크나큰 죄악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들은 언제나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선물을 주시는대로 다 받는게 아니라 받을 수 있는 만큼만 받습니다. 즉 ‘나’라는 그릇을 비우고 준비한만큼 받는 겁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는만큼 비워지기에 결국 우리는 베풀고 나누는만큼 받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 속 셋째 종처럼 받은 탈렌트를 묵혀두고만 있으면 더 큰 은총을 받을 수도, 이미 받은 은총을 제대로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벌써 연중 제33주일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돌아보며 갈무리해야 할 중요한 시기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처박혀 먼지만 수북히 쌓여있는 ‘잃어버린 탈렌트’는 없는지 찾아봐야 할 때입니다. 그 탈렌트를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힘 없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고통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웃의 손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소홀했던 가족 친구 은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미소 띤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실 겁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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