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38. 하느님 나라의 도래 / 상경기[3] / 공관복음[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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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1-21 | 조회수25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8. 하느님 나라의 도래(마태 24,23-28.36-41; 마르 13,32-37; 루카 17,20-37) / 부스러기 복음[113] “보라,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말씀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그분께서 악령을 쫓으시고 치유 기적을 베푸심으로써 드러났기에. 따라서 그분 믿음에 따라 그 나라를 받아들이는지가 결정된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 마음에 늘 함께한다. 우리는 가끔은 다음의 질문을 받는다. “당신은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대부분은 ‘예.’라는 답을 확신을 두고 못한다나. 무언가 걸리는 게 있으니까. 그러나 믿는 이는 답하리라. “물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분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릴 테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마지막 날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어도,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란다. 이는 구원받을 이와 그러지 못할 이가 반드시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 구원은 신분보다 자신만의 고유한 삶이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진정으로 실현하였나를 두고 이루어진다나.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잘 맞이하려고 평생 준비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준비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 그분께서 세우시려는 그 나라가 우리가 희망하는 나라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시종일관 성찰하자. 어쩌면 우리는 종말을 향해 가는 이다. 그곳은 흔히 죽음이 머무는 곳이 아닌, 이 세상 완성인 곧 하느님 나라일 게다. 세상 마지막에 하느님 뜻이 완성될 것이기에. 그렇지만 다들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찾아오느냐고 안절부절 한다. 아니 아예 ‘여기에, 저기 있다.’라며 떠든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어떤 장소로 오는 게 아니라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셨다. 당신께서 더불어 머무시기에 그 나라가 이미 우리들 가운데 와 있다나. 이렇게 그 나라란 어떤 장소를 뜻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이란다. 곧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은, 그게 다 하느님 나라이리라. 그 나라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미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여기에 이루어졌기에.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온전히 이루어진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그날을 늘 깨어 기다리자. 그러면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 나라를 만난다나. 먼 날을 마냥 기다리며 허송할 게 아니라, 지금 우리네 일상의 삶에서 자라는 하느님 나라를 열심히 찾도록 노력하자.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이 나라는, 늘 우리와 함께한다. 죽음 저 너머의 그곳을, 이곳에서 반드시 체험하자. 그리고 그 길에서 자꾸 뒤돌아서서 아쉬워해서는 안 된다. 뒤돌아보는 이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려 하느님께 영영 나아갈 수가 없을 게다. 종말 신앙은 삶이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리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는 신앙인이다. 누구나 하느님 뜻에 따라 왔다가 반드시 그분께로 돌아간다. 세상 종말이란 끝이 아닌 완성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완성을 향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사랑이신 하느님 말씀을 늘 바로 되새기면서 삶으로 받아들이자. 사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그때의 사건이기에 실상 이 세상에는 그리 매이지는 않을 수도. 다만 어떻게 살았느냐의 그 결과일 테니까. 이 세상 인연과 체험들이 사라지는 게 아님을 믿자. 이렇게 믿는 이에게는 종말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 세상 끝과 저 세상 시작인 그날을 낙엽 지는 이즈음, 시간 내어 차분하게 한번쯤 되돌아보자.[계속] [참조] 이어서 ‘39. 불의한 재판관(루카 18,1-8)’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드시면서 말씀하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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