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블랙보우냐, 호라우냐. (루카18,35-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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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1-21 | 조회수20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2> 블랙보우냐, 호라우냐. 복음(루카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 시련(試鍊), 고난(苦難)의 삶을 살고 있는 자(者)다.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신이 낮아졌다는 선포다. 곧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사제☞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을 때, 그러한 비판에 직면해서 더욱 작아지는 우리에게 더욱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라고 깨우쳐 주는 것 같습니다. 비판에 직면하면 할수록 더욱 굳건하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줄 아는 그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함을 깨우쳐 줍니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믿음이며 구원이라 하심이다. 군중(群衆)가운데 자신의 고난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바램은 믿음, 구원과는 연결되지 못한다는 말인가? 앞절로 가보면~ (루카18,31-34) 3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가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32 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침 뱉을 것이다. 33 또 채찍질하고 나서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34 제자들은 이 말씀 가운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말씀의 뜻이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어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 말씀 안에 감추어진 뜻을 보게 해달라고, 곧 깨닫게 해달라고 한 것이 구원의 믿음인 것이다. 사제☞ 많은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보아도 본 사람마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한 느낌이 다름을 봅니다. 자신의 눈으로 다 보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봅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보다’에는 네가지가 있다 ① 옵타노마이 - 보이는 대로 보는 것. ② 아이돈 - 놀라워 우상삼아 보는 것. ③ 블랙보우 - 고난, 생각 중에 보는 것. ④ 호라우 - 깨달음으로 보는 것. 본문에 눈먼 이는 ‘블랙보우’ 상태애서 ‘호라우’를 청(請)한 것이다. 곧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그 자신을 버리는, 부인(否認)한 자로서 청한 것이다. 그래서 얻은 믿음, 구원인 것이다. 군중(群衆)은 예수님을 기적과 능력, 힘 있는 큰 사람으로, 곧 ‘아이돈’ 우상삼아 보았기에 믿음, 구원을 얻지 못했다. 눈먼 이는 하느님의 뜻,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청했고 응답을 받은 것이다. 사제☞ 인간의 성숙과 변화는 어떠한 것이든 내가 갖고 있는 문제가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알 수 있을 때 일어납니다. 43 (그래서)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 기도 한다는 자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먼 이의 블랙보우 상태, 곧 눈먼 상태에서 사람들의 눈총, 괄시를 견디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고심하고 노력했을 그 시련의 시간이 길었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고난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으면 주님을 큰소리로 부르짖었고,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소리도 개의치 않았다. 그 블랙보우(고난, 훈련)의 상태에서 인내(忍耐)로 생각하는 시간을 사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이다. 사제☞ 요술 같은 행운이나 극적인 눈물의 화해는 영화에나 있는 것 같다. 그런 바램대신 시련을 겪는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인생을 다르게보는 마음의 눈을 뜨면 신앙의 눈이 더 밝아진다. 하느님의 뜻, 예수님의 수난, 죽음을 ‘호라우’하자! (이사52,13-15. 53,1-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 가장 낮은자리,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십자가)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아훼)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저주의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1요한4,9-12)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 인간의 지각(知覺)으로는 깨달을 수도, 믿기도 힘든 사랑이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1코린13,4), 곧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버림으로 하는 것이다.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고,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에 할 수 있다고 한다.(1요한4,13) 하느님께서 약속 하셨기 때문이다. (에제36,26-27) 26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27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보게(호라우)하시어 아버지의 뜻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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