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시다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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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11-26 | 조회수294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하루하루, 날마다, 늘, 끝까지. 한결같이, 평생을”-
오늘이 흡사 모든 보물을 다 품고 있는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창고같습니다. 오늘은 연중 마지막 33주일이자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자 “제38차 세계 젊은이의 날”이며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이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희망 속에 기뻐하십시오”(로마12,12)라는 주제로 참 멋지고 풍부한 담화도 발표했습니다.
참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희망과 기쁨의 왕이시며 이런 주님을 잘 알고 사랑하기 위해 성서공부는 필수입니다. 이번 성서주간에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이런 그리스도왕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거기가 바로 하늘 나라이고 살아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바로 여기 요셉 수도원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바로 어제 생전처음 수도원에 피정 왔다 떠난 개신교 자매님에게 수도원은 “살아 있는 보물창고” 같다며 내년 달력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하여 “보물창고”라는 시를 보내왔습니다.
“그곳에 가면 나무 한 그루 있지 날아드는 새들 따스하게 맞아주고 편히 머물도록 품어주는 늘 거기에 서있는 나무 한 그루있지 나무가 주는 푸르름과 싱그러움 열매와 그늘 사그락 잎사귀 소리마져도 모두 보물이지 늘 한 영혼 기다려주는 나무 한 그루 바로 모든 이의 보물창고” -2023.11.25. 프란치스코 수사님의 말씀 듣고 염혜영-
더불어 생각나는 26년전 “사랑이란 이런 것”이란 자작시였습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 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이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한 그루의 나무가 상징하는 바 보물창고 같은 수도원이요 제가 소망하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제 그 자매에게 “하늘과 산”이라는 시집과 “겨울 나무 예찬”과 더불어 “시가 찾아 왔네!” 이라는 시도 선물했습니다. “시가 찾아왔네!”라는 시 전문도 그리스도왕 대축일 선물로 나눕니다. 그대로 일편단심 사랑해온 그리스도왕께 드리는 헌시獻詩입니다.
“詩가 찾아 왔네! 나를 은총처럼 사랑하는 詩가 가슴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詩가 나 외로울 때, 그리울 때, 기다릴 때 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참 반가운 손님, 참 기쁜 선물, 참 좋은 연인, 참 좋은 친구인 詩 늘 詩를 생각하며 詩와 함께 살아왔고 살고있고 살것이라네 詩덕분에 하루하루 날마다 늘 평생 한결같이 살아왔네 詩없이 이 삭막한 광야여정 무슨 맛, 무슨 기쁨,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눈이 열리니 온통 詩인 천국이라네 세상에 나보다 평화롭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이 없을 것이네 나 언제나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이라네”
주님을 사랑하듯 시를, 삶을 사랑해 왔기에 시는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참으로 혼란스럽기가 그리스도왕이 제정되던 1925년 때와도 흡사한 작금의 세계입니다. 1925년 그때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얼마후로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로 인해 세상이 중심을 잃고 암흑의 혼돈중에 있던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교황 비오 11세가 세상의 빛이자 생명이요 희망이자 기쁨이신 그리스도를 온 누리의 중심이자 왕으로 선포하는 대축일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중심을 잃고 혼돈중에 방황하다 마침내 1239년 세계 제2차 대전의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1939.9.1.부터 시작되 전쟁은 1945.9.2.까지 무려 만 6년 동안에 세계는 폐허가 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지 78년이지만 여전히 계속 반복되는 전쟁이요 오늘 역시 세계는 중심을 잃고 혼돈중인 참 위태한 상황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을 더욱 필요로 하는 절체절명의 절박하고 긴박한 상황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방금 힘차게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는 지요! 하루 종일 끊임없이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싶은 시편 성구입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왕님은 이처럼, 우리를 끝까지 언제나 돌보고 섬기는 착한목자입니다.
결코 폭압적으로 위압적으로 통치하고 다스리는 독재자 임금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전례기도시 아름답고 감격적인 말마디들도 우리를 기쁨으로 뛰놀게 합니다. 우리 여기 수도자들은 다음 장엄한 초대송 후렴 고백으로 대축일을 활짝 열었습니다.
초대송; “왕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 어서와 조배드리세.”
이어지는 찬미가와 시편 두 개의 후렴 노래 역시 참 고무적이었습니다.
찬미가; “예수님 놀라우신 임금이시여, 우리의 위대하온 승리자시여 말로다 표현못한 감미이시여 온전히 갈망할 수 있는 임이여”
후렴1; “보라, 떠오르는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분을 그는 옥좌에 앉아 다스리시며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전하리라” 후렴2; “만왕의 왕, 군주의 군주이신 예수께 영광과 주권이 세세에 있으소서”
세상이, 우리 삶이 이처럼 혼란스럽고 복잡한 것은, 두렵고 불안한 것은 삶의 중심이 분명치 않거나 없기 때문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나라”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길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길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소개하는 그리스도왕의 모습이 우리에게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아드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자 일꾼인 온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 참 은혜롭습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새롭게 명명하면서, 천상교회와 지상교회 모두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왕의 축일을 최고 등급의 대축일로 격상했고, 이어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연중 제33주일에 배치함으로 이날 모든 것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참 좋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섬기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착한목자 그리스도왕이시며, 우리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분의 뜻을 자발적 기쁨으로 기꺼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을 통해 착한목자 우리 주 그리스도왕의 마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바로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개한 착한목자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십니다.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사랑하고 섬깁니까? 주님은 곤궁중에 있는 이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며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참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듯,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1.굶주린 이들, 2.목마른 이들, 3.나그네들, 4.헐벗은 이들, 5.병든 이들, 6.감옥에 갇힌 이들”
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거론하시며 바로 이것이 최후심판의 잣대임을 분명히 못박습니다. 심판의 잣대는 결코 자폐적 자기만족의 전례생활도, 관상생활도 아닙니다. 이건 분명한 착각의 엉뚱한 짝사랑입니다.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오는 삶의 절실함이나 절박함이 증발된 전례나 관상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만의 참으로 부끄럽고 헛되고 공허한 위선적 신성모독 행위이겠습니다.
전례나 관상의 진위는 반드시 어떤 형태든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이 참으로 역겨워하는 것은 이런 사랑의 결핍된 위선적 거짓 관상, 거짓 거룩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예화는 기존의 제반 종교를 심판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연 나는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입니까? 혹은 버림 받은 왼쪽의 염소들입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한가족입니다. 인종, 종교, 문화, 언어, 국적, 남녀노소에 관계 없이 가장 작은 이들 모두를 내 형제들이라 하며 작은 이들 하나하나와 당신을 동일시 하는 주님이십니다. 참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이런 가난한 주님의 형제들인 주님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린 일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주변 모두가, 특히 가장 작은 이들 모두가 주님의 살아 있는 성체요, “주님의 얼굴”인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 만나는 주님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이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후자가 빠진 전자의 미사뿐이라면 반쪽의 미사뿐일 것입니다. 미사전례를 통해 그리고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미사의 완성이요 온전한 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벌이나 영원한 생명 역시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추호도 온 누리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할 때 마다 이 진리와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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