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43. 손수 자캐오의 집에 가신 예수님 / 상경기[3] / 공관복음[118]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1| | |||
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1-28 | 조회수14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43. 손수 자캐오의 집에 가신 예수님(루카 19,1-10) / 부스러기 복음[118] 자캐오, 그는 누구인가? 그는 예리코에서 세관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고, 돈 많은 이었고, 대단히 키 작은 이었다. 그의 신상명세는 이게 전부다. 세속적으로야 세관장이었기에 재산도 제법 모았겠지만, 신앙의 면에서는 유다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이다. 게다가 그는 너무 작은 신장이기에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단다. 그렇지만 그는 결단코 그분을 보려 애썼다. 왜 그토록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 세관장이라는 죄스러운 직책에 대해서 특별한 구원을 받으려고. 더러운 돈이 좀 있어, 그 일부를 자진 헌금하려고. 아니면 그 작은 키를 조금 더 자라게 해달라고 부탁하고자? 암튼 그는 예수님을 기어이 보고자 일행을 앞질러 달려가 길가의 돌 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다.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을 선동가로 트집을 잡고자 하였지만, 그는 단번에 구세주라고 알아보았을 게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며, 예수님은 새처럼 매달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그분은 언제나 초대받으셨다. 예수님이 이번처럼 먼저 방문한 예는 자캐오가 처음인성 싶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카나의 잔칫집도, 중풍 걸린 종의 백인대장도, 야이로라는 이름을 가진 회당장의 집에서도, 그분은 가는 곳마다 언제나 초대받으셨다. 그런 분이시기에 나무에 매달린 그 키 작은 자캐오를 보는 그 순간, 눈망울에 맺힌 그 어떤 부르짖음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으리라. 저토록 보고자 하는 저 집념의 마음을 알아보신 게다. 예수님의 말씀에 지금껏 자캐오가 가진 온갖 상념이 사라졌다. 수많은 적개심과 원망, 그리고 온갖 부끄러운 것들이 순식간에 녹는 것 같았다. 실로 자캐오도 사람인지라 어떤 복수심을 하루에도 수없이 가졌으리라. 하기 좋은 쉬운 말로, 소위 남을 등쳐먹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세관장 직책을 수행하였건만, 주위에서는 마치 그를 ‘죄인’ 취급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사실 그는 그저 나무에 올라가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소연하고자, 당신이 나의 구세주라고 솔직히 고백하려고, 아니,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셔 식사라도 한 끼 하고 싶었을 게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찌든 병들이 치유되는 것 같은데, 당신 스스로 방문하시겠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몰랐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렵니다. 그리고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단돈 한 푼도 허튼 수작으로 속인 게 없다는 거다. 또 만에 하나라도 그런 때 묻은 돈이 있다면, 그것의 네 곱절로 보상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다. 어쩜 이건 하느님을 저버리면서까지, 남의 것을 받지 않았다는 양심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주위에서는 죄인 취급을 하고 있지만, 자기는 단 한 푼이라도 속여서 까지는 욕먹을 짓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예수님은 이런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자캐오는 몸소 나눔을 실천하려 했다. 더구나 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초대하려는 믿는 이였다. 그러기에 그분께서는 ‘오늘 네 집에 가겠다.’라며 손수 응했고, 자캐오는 기쁜 맘으로 정성껏 모셨다. 예수님도 이런 삶에는 늘 함께 하시리라. ‘그래, 오늘은 네 집에 머무르겠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보인 그 다정한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도 기꺼이 드러내실 게다.[계속] [참조] 이어서 ‘44. 미나의 비유 (마태 25,14-30; 루카 19,11-27)’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이 ‘미나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에 해당하는 것으로, 둘이 흡사한 또는 동일한 본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