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 제1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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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12-04 | 조회수18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대림 제1주간 월요일] 마태 8,5-11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그 어떤 유다인보다 훌륭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그의 마음 속에 사랑과 자비, 공감과 배려, 겸손과 순명이라는 미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이 아니라 ‘상품’ 취급을 받던 노예, 즉 종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 부탁하는 모습에서 그가 지닌 사랑과 자비가 드러납니다. 그는 신분이나 지위고하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 종을 소중한 ‘한 사람’으로 대한 것입니다. 종을 소중한 ‘자기 사람’으로 여겼기에 그를 위해 예수님을 찾아가는 ‘수고’도, 점령군의 장교로서 속국의 평범한 사람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굴욕’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그의 사랑과 자비를 어여삐 보시고는 이례적으로 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그를 고쳐주겠노라고 약속하시지요.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먼저 호의를 베풀어주시겠다는데도 이를 마다합니다. 그런 모습에서 그가 지닌 공감과 배려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는 ‘유다인’인 예수님이 ‘이방인’인 자기 집에 들어오시면 그들의 율법에 따라 ‘부정한 사람’이 된다는걸, 그 부정함을 씻기 위해 불편함과 수고를 감수하셔야 한다는걸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와주시는건 기쁜 일이지만, 그분께 수고와 불편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다’며 자신을 낮춥니다. 그저 멀리서 그에게 병에서 나아 건강해지라고 ‘한 말씀’만 해주시면 그걸로 충분하다며 예수님을 말립니다. 상대방이 나로 인해 겪는 수고와 어려움에 깊이 공감할 줄 알고, 되도록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배려하고자 하는 그의 속 깊은 마음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백인대장의 ‘자기 객관화’를 통해 그가 겸손과 순명의 정신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사실 그는 점령국의 장교로서 속국의 평범한 한 사람 정도는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힘의 논리를 앞세워 예수님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구세주와 백성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그분께 구원에 관한 주도권과 결정권을 온전히 내어드린 겁니다. 그가 겸손하고 진실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신심이 깊다는 유다인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성숙한 믿음의 모습이기에, 예수님은 그를 드러내놓고 칭찬하신 것이지요.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지니신 권한과 능력을 신뢰하는 수준을 넘어, 그분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는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유다인’이 아니라도 당신 뜻에 맞는 올바른 것을 청한다면 반드시 들어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주님이라면 자기 종이 처한 딱한 처지를,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하는 자기 선의를 외면하지 않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와 그의 종 모두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것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백인대장의 기도’를 바치는 겁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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