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 제1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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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 매일미사/2023년 12월 5일 화요일[(자) 대림 제1주간 화요일] |1| | |||
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3-12-04 | 조회수576 | 추천수5 | 반대(0) |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지혜와 경륜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것을 뜻합니다. 신부님들의 좋은 강론을 듣는 것은 제게는 ‘타산지석’의 기쁨입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심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동양인 대학생과 서양인 대학생을 상대로 ‘장점’을 칭찬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서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신의 장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겸양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하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할지라도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독일인들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가 확실하게 되니 깨끗하게 인정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패배가 확실했음에도 ‘옥쇄’ 작전을 펼치면서 연합군을 당황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를 연구한 책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입니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의 근간이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은 어떤 사상적인 바탕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종의 비유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은 동양적인 사상과 더 친밀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김재덕 신부님의 ‘예수님과 만난 여인들’ 중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또한 제게는 ‘타산지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방법이 아닌 것으로, 은총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사제의 바람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더욱 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유학 갔다 온 모든 사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미 같은 과목의 신부님이 신학교에 있는 경우도 있고, 신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실망하기 보다는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했던 그 일들이 나중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커다란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작은 성당에서 기쁘게 살았고,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교구청에서 지낼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는 몹시 아팠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청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믿음은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빠가 죽어서 원망스러울지라도 지켜가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우선 될 수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끝까지 지키고, 간직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다른 것과 바꾸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정말 은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얻은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을 하찮은 것들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믿음은 항구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상처를 받아서. 미워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지라도 소처럼 우직하게 믿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유 없는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이 클수록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매 미사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을 보시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십니다. 나의 기도를 보시고 누군가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보시고 죄인을 구하십니다. 나의 기도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기도와 믿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인들의 통공을 청하며,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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