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루카 10, 21- 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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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3-12-04 | 조회수11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10,23) 저는 베트남에서 살고 있을 때부터 음악 프로그램을 즐겨 보았습니다. 지금도 ‘불후의 명곡’이나 ‘복면가왕’ 그리고 ‘팬텀싱어’와 같은 음악 프로그램은 즐겨 시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복음을 읽다 보니 먼저 떠 오른 노래가 ‘김범수’의 「보고 싶다」라는 노랫말입니다. 잠시 그의 노랫말을 인용하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난 못가 바보처럼 울고 있는 너의 곁에 상처만 주는 나를 왜 모르고 기다리니 떠나가란 말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이런 내가 미워질 만큼 울고 싶다 네게 무릎 꿇고 모두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미칠듯 사랑했던 기억이 추억들이 너를 찾고 있지만 더 이상 사랑이란 변명에 너를 가둘 수 없어 이러면 안되지만 죽을 만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세상을 살아오면서 죽을 만큼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사람은 아직도 살아갈 희망이 남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참으로 슬프지 않겠어요. 이런 사랑앓이는 분명 불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고 싶은 사람을 보는 것은 분명 행복이며,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10,23)는 의미를 알아듣고자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이 ‘보는 행복’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만이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되고, 듣고 싶은 것도 듣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보는 것이 행복하다,’는 의미는 흔히 우리들의 습관적이며 타성적인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봄과 들음’을 위해 필요한 것은 비딱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바로 오늘 복음의 철부지 어린아이와 제자들의 맑고 깨끗한 마음의 눈입니다.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때 하느님을 볼 것이며,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그때야말로 보이는 모든 것, 곧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사실 이런 신앙의 경지에 이른다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거룩하며 기쁨과 감사로 넘쳐나리라 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람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사람들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11,3.9)라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기 위해 어제의 묵은 인간이 아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미처 버리지 못한 나의 아집과 편견 그리고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 현세적인 욕심과 관심 등에서 떠나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껏 배우고 깨달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몸으로 느끼고 겪으며 체험한 경험들까지도 하느님을 알아가는 데 장애와 걸림돌이 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점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헤아릴 수 없는 공간이 변해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다 부질없는 것이고 헛된 것이라고 말씀하신 듯싶습니다. 아빠 하느님을 아빠 하느님으로 알아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려야 합니다. 어제의 지식과 경험이 도리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한다면 예수님께서 보고 들으시는 그 마음으로 온전히 살기 위해 우리는 육신적인 눈과 귀만이 아니라 영적인 귀와 눈을 떠야 하고, 귀가 열려야 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는 귀는 행복하다.”(10,23) 그런 참 행복을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기 위해 우리는 깨어 일어나야 하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과 같은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고 내일은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오늘은 주님의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앎으로 예수님의 영이 머물 것이며. 그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고, 하느님의 뜻을 살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우리 네 삶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면서” (로12,2) 자신 안에서 큰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모습을 뵙고 살아가니 이보다 더 참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언제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을 앞당겨 누리는 축복일 것입니다. 또한 저의 관심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도 예수님께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성령으로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행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죽을 만큼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아빠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의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건들을 통해서 보고,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축복을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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